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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바이 마이 프렌드[The Cure]발달심리






 

......굿바이 마이 프렌드(The Cure)
 

ㆍ제작년도 : 1995년

ㆍ제작국가 : 미국

ㆍ감독 : Peter Horton

ㆍ출연 : Joseph Mazzello, Brad Renfro, Diana Scarwid, Bruce Davison

 

피터호른 감독의 <굿바이 마이 프랜드>에는 에이즈에 걸려 죽음의 길에 들어선 친구를 구하기 위한 눈물겨운 우정이 담겨 있다. 수혈로 인해 에이즈에 걸린 덱스터(조셉 마젤로 분)에게 이웃에 살고 있는 에릭(브래드 랜프로 분)은 유일한 친구이면서 동시에 가장 따뜻한 우정의 대상이다. 어떻게 이들의 우정은 서로의 값진 사랑을 표현하고 있을까? 자! 그럼 한번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에릭은 에이즈로 괴로워하는 덱스터의 병을 낫게 해주고 싶어, 이름 모를 약초를 뜯어 달여 먹이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이러한 어린 친구의 맹목적인 우정은 덱스터에게 오히려 독초를 먹이는 결과를 만들어 버리고 만다. 따라서 덱스터는 병원 신세를 지고, 생명의 위험에 치닫는데…

 

강을 따라 찾아가는 사랑의 신약?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 에릭은 기쁜 소식을 접한다. 뉴올리언스에 살고 있는 피시번 박사가 에이즈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둘은 뗏목을 타고 1200만 마일이나 되는 강을 거슬러 내려가는 긴 항해에 오른다. 영화 속에서 둘은 강을 따라가는 뉴올리언스로 가는 방법을 택하는데, 왜 그들은 하필 강을 선택했을까? 미국에서 흔한 히치 하이킹을 할 수도 있고, 고속버스나 조금 비싼지만 비행기를 이용할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작가가 원하는 강의 깊은 상징성 때문이다.

 

강이 주는 죽음과 인생의 상징성

강은 항상 미래를 향해 흘러간다. 강물은 유유자적 흐르는 듯이 보이지만, 그 끝은 시간의 마지막, 바로 죽음을 상징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현재는 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또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은 흘러간다는 의미에서 삶의 과정, 또는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영상으로 강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강은 한번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우리네 인생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들의 인생은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지만 그곳에는 대개 우리의 마지막 모습인 죽음이 그곳엔 예비되어 있다.

 

신발을 통한 아주 특별한 위로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이 둘이 뗏못을 타고서, 그 긴 강을 건너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여기서 그들이 건너는 강은 바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는 강인지도 모른다. 덱스터는 아직 살아있지만, 에이즈라는 병에 걸려서 이미 저승의 문턱을 반쯤 넘어선 상태다. 그러나 에릭은 저승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덱스터의 죽음의 세계로 같이 뛰어 들고 싶어한다. 에이즈에 걸린 덱스터는 드디어 식은땀을 흘리면서 잠을 자지 못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로 두려워 떨게 된다. 이런 덱스터의 공포를 에릭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위로하기 시작한다. 에릭은 자신의 냄새나는 신발을 벗어 덱스터에게 안고 자라고 한다. 신발은 우리의 육신을 땅이라는 현실과 맞닿게 하는 역할을 한다. 신발은 우리의 현실적인 면을 일깨우고 죽어가는 과정에 있으면서도 저승세계에 아직은 도달하지 않았다는 걸 일깨워 주는 도구이기도 한다.

 

따뜻한 우정과 행복을 일깨워주는 도구, 신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이미 마음은 저승에 가 있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무관심하거나 체념하는 경우가 많다. 에릭의 신발은 그래서 덱스터에게 자신이 처한 현실의 행복과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장치가 된다. 결국 덱스터의 몸은 힘든 여행으로 너무나 지쳐 둘의 여행은 무산되고, 에이즈가 악화된 덱스터는 병원에 입원하고 만다. 에릭은 단지 덱스터가 건너는 죽음의 강에 마지막까지 동행하기 위해 그 배에 타고 있을 뿐이다.

 

죽음의 공포를 덜어주는 둘만의 놀이

이 때 에릭은 덱스터의 죽기 직전까지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끌며 이승의 삶을 즐기도록 도와준다. 죽음이 수시로 덱스터의 가슴을 짓누를 때마다 죽음의 공포를 덜어주는 둘만의 놀이가 시작된다. 병원에서 에릭은 지나가는 간호사에게 황급히 달려가 덱스터가 갑자기 숨을 쉬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그러면 놀란 간호사는 덱스터에게 달려가 정신없이 그를 살피는데, 이 때 덱스터가 큰소리를 지르면서 벌떡 일어나면 간호사는 기절할만큼 놀란다. 이런 죽음의 장난을 하면서 둘은 병원에서 즐겁게 지낸다.

 

마지막 장난과 힘없는 동의…

둘의 장난은 정말 장난에 불과할까? 이런 장난을 하는 이면에는 이런 놀이를 통해, 덱스터는 덱스터대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음 마음이 있고, 에릭은 친구를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유머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없애는 데 도움을 주고, 또 개인적인 성장과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 거듭되는 '죽음의 장난'은 둘에게 죽음의 공포를 완화시켜준다. 탄생이 인생의 한 부분인것처럼 죽음도 인생의 한 부분이다. 둘이 벌이는 장난처럼 텍스터는 장난스럽게, 가볍게 자신의 즉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죽고 살아가는 이런 반복 행위를 통해, 그는 재생의 기쁨을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에이즈 바이러스가 온몸에 퍼져 면역 체계를 모두 갉아 먹었을 즈음, 에릭은 덱스터에게 또 한번 같은 장난을 하자고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병마에 지친 덱스터는 힘없이 동의한다. 그는 힘없이; 눈을 감은 채 다음에 놀려줄 상대가 누구일지 기다린다. 곧 놀란 의사가 달려오고, 덱스터를 살펴보던 의사는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덱스터는 이제 다시는 의사를 놀래주기 위해 벌떡 일어날 수 없게된 것이다. 마지막 장난이 곧 그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저승까지 함께 가고자 한 에릭의 우정

에릭은 덱스터의 장례식에 참석해, 마지막으로 그의 시신에 작별의 인샤를 고한다. 그 때 에릭은 덱스터의 시신에 신겨진 신발 한 짝을 몰래 들고 나오면서 대신 자신의 운동화 한짝을 덱스터의 양손에 곱게 쥐어준다. 예전에 서구에서는 마음에 드는 처녀의 신발을 얻은 총각은 그녀를 아내로 얻는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즉 여기서도 신발은 그 사람 자신을 상징한다. 에릭의 냄새나는 운동화는 곧 에릭 자신을 상징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육신이 닿지 못하는 저승세계에까지 친구와 동행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혼자 떠나가는 덱스터의 영혼이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에릭의 따뜻한 마음의 표시이다.

 

죽음의 너머에 있는 그 어떤 것…

밖으로 나온 에릭은 신비의 약을 구하기 위해 둘이 뗏목을 타고 떠났던 그 강가에서 죽은 덱스터의 신발을 조용히 뛰워보낸다. 신발이 그 사람 자신을 상징한다고 했는데, 이제 덱스터의 분신인 신발은 조용히 강물을 따라 흘러간다. 이게 바로 자연의 순리이다. 망자의 분신인 신발은 혼자서 지옥의 강인 스틱스로 흘러간다. 산자와 동반하지 않고 자유롭게, 그리고 그동안 지치고 힘든 덱스터의 육체를 떠받들면서 억지로 현실과 연결시키는 어려운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두 소년의 우정은 AIDS를 치료할 수는 없었으나, AIDS가 초래하는 필연적인 결과인 죽음의 두려움을 치료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릭과 덱스터는 비록 어리지만, 그들의 우정 속에서 인강이 가장 무서워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죽음 그 너머의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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