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Book./冊.冊.冊

- 짧지만 화려한 축제 /라이너 슈탐 (Rainer Stamm),

 

 

 

 

 

짧지만 화려한 축제

 

릴케가 가장 사랑한 표현주의 예술의 선구자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그림과 삶

 

 

책소개---

 

시인 릴케가 사랑했던 표현주의 여성화가 파울라 모더존 베커
부부관계 없는 결혼생활, 아이에 대한 갈망, 작품을 바라보는 화단의 냉대 등
눈물과 고통의 예술가에서 독일의 국민 화가로 평가받기까지의 과정!

이 책은 31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이후 미술계에 무시할 수 없는 족적을 남긴 독일 표현주의 화가 파울라 모더존 베커(1876~1907년)의 전기이다. 그녀는 당시 최신 화풍이던 외광파 화풍을 따르면서도 풍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위대한 단순함’이라는 자신의 모토에 따라 독특한 화풍을 개척했으며,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 미술을 현대로 끌어올렸다”는 평과 함께 독일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부부관계가 없는 결혼생활과 아이에 대한 갈망, 자신의 화풍에 대한 화단의 냉대 등으로 생전에는 말 그대로 ‘고난의 예술가’였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는 우리에게 두 가지 초상을 보여준다. 하나는 세상의 무관심과 냉대에 맞서 꿋꿋이 자신의 길에 전념한 당시 ‘예술가의 초상’이며, 다른 하나는 여성 혹은 아내이자 화가라는 입장에서 ‘모성’이라는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는 ‘여성의 초상’이다. 책은 이 여성화가의 두 모습을 그녀와 주변 사람들이 남긴 편지와 메모, 일기와 당시의 기록들을 참고하여 마치 눈앞에 보듯 생생하게 그려낸다. 저자인 라이너 슈탐은 예술의 도시 파리와 독일의 예술인 마을 보르프스베데를 중심으로, 1900년을 전후한 당시 예술인과 지식인의 사생활과 사유를 특유의 꼼꼼한 문체로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잡아낸다.

그 누구도 아닌 너, 다른 어떤 여성보다도 나를 많이 변화시킨 너.
ㅡ 라이너 마리아 릴케,「벗을 위한 레퀴엠」중에서

1895년, 파울러 모더존 베커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보르프스베데파 미술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그리고 우정과 애정이 섞인 평생의 친구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만난 곳도 이곳이었다. 릴케와 파울라 베커 사이의 우정은 그녀의 평생을 두고 지속되었다. 때때로 소원해진 시기도 있었지만 각자 결혼을 하고 나서도(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결혼했다. 파울라가 오토 모더존과 약혼한 직후, 릴케가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대체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릴케는 파울라를 “자신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여성”,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듣는 귀”, 인생의 길을 알려주는 ‘조언자’로 간주했다. “저녁이 되면, 당신의 곁에서 쉬고 싶습니다”라며 약혼에 대한 축시를 쓰면서도 파울라에 대한 그의 감정은 변함이 없었다. 파울라의 사후에도 그리운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를 완성하기도 했다. 처음 만나던 당시 릴케의 일기에 적힌 시를 보면 파울라 베커에 대한 그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이렇게 책에서는 파울라 모더존 베커와 평생에 걸쳐 애정과 우정이 섞인 교우관계를 유지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내적인 고민 역시 들여다볼 수 있다

 

著---

라이너 슈탐 (Rainer Stamm),

예술사가이자 작가이다. 근대 예술과 문학에 대한 글을 많이 펴냈으며 파울라 모더존 베커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편지를 출판하였다. 2000년부터 브레멘의 파울라 모더존 베커 박물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목차--

 

저도 야망이 생긴답니다(드레스덴, 브레멘, 런던. 1876~1895)
나는 이제 눈으로 산다(베를린. 1896년 4월~1897년 7월)
반짝거리는 불빛이었어요(보르프스베데와 베를린. 1897년 7월~1898년 5월)
투쟁과 전투(보르프스베데. 1898년 9월~1899년 12월)
피트거와의 논쟁(브레멘. 1899년 12월)
새로운 세계(파리. 1900년 초~6월)
그리워하던 땅(보르프스베데. 1900년 6~12월)
예술과 요리(베를린. 1901년 1월~3월)
저는 성공하고 있어요(보르프스베데. 1901년 3월~1903년 1월)
샴페인을 품은 공기(파리. 1903년 2~3월)
여기 우리 이웃들에게 돌아왔고(보르프스베데. 1903년 3월~1905년 2월)
파리를 향한 커다란 그리움(파리. 1905년 2~4월)
따지지 않고 바로 그리며(보르프스베데. 1905년 4월~1906년 2월)
새로운 삶(파리. 1906년 2월~1907년 3월)
이상한 기분이에요(보르프스베데. 1907년 4~11월)
레퀴엠

후기
옮긴이의 글
서지와 텍스트 출처
그림 출처
찾아보기

 

 

책 속으로---

 

이 친구들은 제 그림을 의심쩍게 바라봅니다. 쉬는 시간에 제가 제 이젤을 떠나 있으면, 여섯 명이 그 앞에 서서 토론을 하지요. …… 한 러시아 여자가 제가 그리는 것이 제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린 것인지, 누가 제게 이렇게 가르쳤는지 묻더군요. 그래서 저는 ‘제 남편’이라고 자랑스럽게 거짓말을 했지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 알겠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 남편이 그리는 대로 그리는군요.’ 자기가 그리는 대로 그린다는 상상들은 못 해요.---「 파울라 베커의 편지」중에서

“이것이 예술에 대해 쓰는 옳은 방법이 아니라는 게 날이 갈수록 분명해집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만 하여라.’” 그녀는 산상설교를 인용한다. “그는 그런 건 몰라요. 훗날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누구와의 관계를 망치지 않으려는 조심성과 두려움. [......] 말이 많고 좋은 문장도 많지요. 하지만 호두를 까 보면 속은 비었어요. [......] 청산유수 뒤에 속이 텅 빈 게 슬슬 눈에 보여요. 말로 당신에게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텐데요. 제가 판단할 때 릴케의 빛은 점점 더 작은 것이 되었어요. 그 작은 빛은 자신의 광채를 톨스토이, 무터, 보르프스베데 예술가들, 로댕, 어쩌면 그가 방문하려고 하는 새로운 친구 술로아가, 그의 가까운 친구인 엘렌 케이, 등등 유럽의 위대한 정신들과 연결해서 밝아지게 만들려고 하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대단한 인상을 주지요. 하지만 그의 삶을 더 들여다보고 인간 감정의 심연과 콸콸대는 예술의 물을 보면, 이 삶이 그만큼 더 공허해 보여요.”---「 릴케의 책에 대한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평」중에서

“그녀는 자신이 지난 5년간 사실은 미혼의 상태로 살았다고 했어요. 그녀와 함께 사는 남편이 불안감 때문에 성관계를 이룰 능력이 없다고 했지요. 그녀는 아무것도 못 느끼고 큰 실망만을 경험했으며, 그가 얼마 전부터 좀 덜 불안해한다고, 하지만 그녀에게는 어떤 접근도 소용이 없고 무의미하다고, 그러니까 불가능하다고 …… 그녀는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이 홀로라면, 남편이 없이 혼자라면 이제라도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지요. …… 실망스러우세요? 저는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거기까지 가지 못할지도 모르지요. ---「 너무 어려운 일이고, 원하는 게 서로 너무 다르니까요.”---「 클라라 릴케의 편지」중에서

“그곳에서 그녀는 조용하고 강렬한 삶을 살았습니다. 때로는 이런 생각을 했겠지요. ‘하고 싶은 말을 해 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 출산 직전까지 열정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자질구레한 것들은 그녀를 비켜갔어요. 그녀가 가졌던 비전은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웅장함으로 가는 새로운 길들만 남았습니다. …… 꼭 오세요. 함께 파울라 모더존의 추억을 정리합시다. 지금은 끝났지만 희망으로 가득 찼던 위대하고 풍성한 삶을 보시게 될 겁니다.”

 

 

출판사 리뷰---

 

“내 삶은 하나의 축제, 짧지만 강렬한 축제이다”
위대한 단순함과 대담한 색채
운명으로부터 모성을 해방시킨 현대적 여성화가

31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이후 미술계에 무시할 수 없는 족적을 남긴 독일 표현주의 화가 파울라 모더존 베커(1876~1907년)의 전기이다. 그녀는 당시 최신 화풍이던 외광파 화풍을 따르면서도 풍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위대한 단순함’이라는 자신의 모토에 따라 독특한 화풍을 개척했으며,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 미술을 현대로 끌어올렸다”는 평과 함께 독일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부부관계가 없는 결혼생활과 아이에 대한 갈망, 자신의 화풍에 대한 화단의 냉대 등으로 생전에는 말 그대로 ‘고난의 예술가’였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는 우리에게 두 가지 초상을 보여준다. 하나는 세상의 무관심과 냉대에 맞서 꿋꿋이 자신의 길에 전념한 당시 ‘예술가의 초상’이며, 다른 하나는 여성 혹은 아내이자 화가라는 입장에서 ‘모성’이라는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는 ‘여성의 초상’이다. 책은 이 여성화가의 두 모습을 그녀와 주변 사람들이 남긴 편지와 메모, 일기와 당시의 기록들을 참고하여 마치 눈앞에 보듯 생생하게 그려낸다. 저자인 라이너 슈탐은 예술의 도시 파리와 독일의 예술인 마을 보르프스베데를 중심으로, 1900년을 전후한 당시 예술인과 지식인의 사생활과 사유를 특유의 꼼꼼한 문체로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잡아낸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와 평생에 걸쳐 애정과 우정이 섞인 교우관계를 유지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내적인 고민 역시 들여다볼 수 있다.

세상의 무시에도 좌절하지 않은 낙천적인 화가

파울라 모더존 베커는 1876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비교적 유복한 가정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열여섯 살 때 영국의 찰스 고모 집에 머물며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896년부터 베를린 여성미술가협회에서 운영하는 미술학교에 들어가며 본격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스케치 없이 바로 그리며, 사물을 투박하게 묘사하는 그녀 특유의 방식은 당시 화가들 사이에서는 무척 드문 방식이었고, 그 진가를 제대로 인정해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아버지의 퇴직 후 집에서의 원조는 수시로 불안해졌으며, 동료들도 선생들도, 심지어는 고향의 가족들조차 파울라의 그림에는 언제나 회의적이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책에서 파울라 베커는 늘 밝고 쾌활하며 활동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끊임없이 사람들과 어울렸으며, 토론을 즐기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다. 게다가 포기할 줄 모르는 노력파이기도 했다. 세상이 뭐라고 하건 그녀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넘치는 에너지로 언제나 모임을 선도해가는 사람, 무서울 정도로 엄청난 수의 습작들을 그려대는 화가, 이것이 주변 사람들이 파울라 베커에게 받는 첫인상이었다. 동시대의 여성화가 산네 브라위니에르의 편지나, 오틸리에 라일렌더, 프리츠 마켄젠의 회고는 그녀의 낙천적인 성격과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보다 결단성 있어 보이는 그 자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잠깐, 이 사람은 중요한 사람이다, 주의!’라고 느끼게 만드는 현명한 갈색 눈빛 때문이었을까? …… 이 사람은 파울라 베커였다. …… 뭔가를 즐기기라도 하듯이 얼굴을 평면 위를 스치는 것처럼 들어 올렸는데, 그 얼굴에서 아주 색이 진하고 맑은 갈색 눈이 상대방을 향해 지혜롭고 명랑하게 반짝거렸다.”
― 산네 브라위니에르의 회고

보르프스베데, 오토 모더존, 그리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95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보르프스베데파 미술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그리고 1898년에 브레멘 근교의 보르프스베데 예술인 마을에 정착하여 자신의 미술의 근거지로 삼는다. 이곳에서 그녀는 소박한 풍경화와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며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일구어나간다. 프리츠 마켄젠, 하인리히 포겔러, 카를 빈넨 등 시대를 앞서갔던 예술가들과, 1901년 그녀의 남편이 되는 오토 모더존 그리고 우정과 애정이 섞인 평생의 친구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만난 곳도 이곳이었다. 훗날 릴케의 부인이 되는 클라라 베스트호프 역시 이곳에서 만났다.

릴케와 파울라 베커 사이의 우정은 그녀의 평생을 두고 지속되었다. 때때로 소원해진 시기도 있었지만 각자 결혼을 하고 나서도(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결혼했다. 파울라가 오토 모더존과 약혼한 직후, 릴케가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대체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릴케는 파울라를 “자신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여성”,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듣는 귀”, 인생의 길을 알려주는 ‘조언자’로 간주했다. “저녁이 되면, 당신의 곁에서 쉬고 싶습니다”라며 약혼에 대한 축시를 쓰면서도 파울라에 대한 그의 감정은 변함이 없었다. 훗날 로댕의 책을 쓰고 그림을 보는 안목이 성숙해진 이후에 릴케는 파울라 그림의 맹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여행 중에 특이한 색채를 발견할 때마다 그가 떠올리는 것은 시상이 아니라 파울라의 그림이었다. 파울라의 사후에도 그리운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는 ??‘벗을 위한’ 레퀴엠??을 완성하기도 했다. 처음 만나던 당시 릴케의 일기에 적힌 시를 보면 파울라 베커에 대한 그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붉은 장미가 이렇게 붉은 적이 없었다네.
온통 비가 오던 그 저녁처럼.
나는 그대의 부드러운 머리를 생각했다네.
붉은 장미가 이렇게 붉은 적이 없었다네.
― 일기에 적은 릴케의 시 중에서

파울라의 인생에서 드물게 평안한 시기였던 예술인 마을의 생활은 1899년 브레멘 전시관에서 열린 전시의 혹평으로 그 종말을 고하게 된다. 자신의 예술을 “초보의 습작”, “예술에 대한 모독”으로 공격하는 피트거의 비판에 도망치듯, 그녀는 예술인 마을을 떠나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파리 여행을 통해 파울라의 예술은 한층 성숙해진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후, 파울라 베커는 아내와 사별한 오토 모더존과 약혼하며 다시 한 번 보르프스베데의 예술인 마을에 정착한다.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와 예술에 대한 열망

오토 모더존과의 결혼생활은 파울라에게 생각지도 못한 시련을 안겼다. 결혼한 지 5년이 지나도록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으며, 서로의 화풍을 둘러싼 대립 역시 조용하지만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림에 대한 부인의 비판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듯 수용하는 오토 모더존과 달리 파울라는 묵묵히 자신만의 예술을 추구하는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오토 모더존은 자신의 그림에 대한 파울라 베커의 비판에는 귀를 기울이면서도 자신의 부인을 어디까지나 “진정한 예술가의 재능을 가진”, “언젠가는 성공할” 화가로만 받아들였다. 파울라에 대해 거의 무조건적인 경애를 보내면서도 자신의 부인이 이미 한 명의 화가임을 인정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민한 문제도 있었다. 파울라는 남편인 오토 모더존과 5년간 성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았다. 오토 모더존 역시 일기에서 자신의 탓임을 시인했다. 아이를 가진 어머니로서의 자신과 성공한 화가로서의 자신을 모두 이루고 싶은 파울라 베커에게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자꾸만 소원해지는 서로의 관계를 타개하기 위해 파울라가 택한 방법은 부부가 잠시 떨어져 지내는 것이었다. 곧 그녀는 자신의 또 하나의 예술의 근거지가 될 파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후 1906년까지 그녀는 모두 네 차례의 파리 방문을 시도하는데, 특히 마지막 파리 여행은 ‘오직 그림만을 그리기 위해’ 남편과의 이혼까지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서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는 더 이상 모더존이 아니고 파울라 베커도 아니니까요.
저는
저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아마도 우리의 모든 싸움의 최종 목표가 될 거예요.”
― 파리로 떠나며 파울라 베커가 릴케에게 보낸 편지

이 마지막 파리 여행의 시기에 파울라 베커의 예술은 모성과 예술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무섭도록 피어올랐다. 당시 그린 ?여섯 번째 결혼기념일의 자화상?은 “자화상으로 그린 최초의 여성 누드화”, “모성을 여성으로부터 해방시킨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파울라 베커 미술의 걸작이다. 예술과 가정, 파리와 보르프스베데의 갈림길에 처한 상황에서, 19세기와 근대 아방가르드 사이에서, 그녀는 자신 있게 자신을 신여성의 육화인 예술가로서 그렸다. 세기가 바뀌던 1906년 당시의 파리에서 이 그림은 상징이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이런 방식을 그 후 수잔 발라동, 프리다 칼로, 신디 셔먼 같은 숱한 여성 작가들이 뒤따랐다. 그녀를 독일의 국민화가이면서 동시에 여성주의 예술의 선구자로 부를 수 있는 강력한 이유이다. 자화상들과 함께 지금도 자주 언급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초상?을 그린 시기 역시 마지막 파리 여행 기간이었다.

짧지만 화려한 축제, 그 이후

그러나 그녀 예술의 강렬한 시기는 책의 제목만큼이나 너무도 빨리 끝나버렸다. 1907년 그녀는 보르프스베데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해 11월, 그토록 원했던 아이를 얻지만 출산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곧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녀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죽음은 파울라 모더존 베커를 삶의 한가운데에서 앗아갔다. 어머니와 예술가 둘 모두를 조화시키겠다는 소망이 이루어지자마자 세상을 급히 떠나야 했다는 사실은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때 이른 죽음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 죽기 직전에 그녀는 단지 꺡아, 아쉬워라!’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그녀의 사후, 유산처럼 남겨진 수많은 작품들과, 그 작품들이 보여주는 미래의 길을 보게 된 사람들 역시 마음속으로 한 결 같이 떠올리게 되는 말이었다.
짧지만 화려한 축제,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삶은 동시대 예술가인 고갱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고갱과 파울라 베커는 둘 모두 사회의 관습과 편견 때문에 고통을 받았으며, 남들이 가지 않은 화풍을 고수했기에 평생을 평단의 무시 속에서 살아야 했다. 타히티의 원시와 민속 안에서 우리가 잊어버린 태고의 모습을 찾아내려 번민한 고갱과 같이 그녀 역시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터치의 고대 이집트 두상과 초상에서 화가 자신만의 시선을 찾아내려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한창 자신의 예술이 결실을 거둘 즈음, 때 이른 죽음과 함께 당대의 미술계를 단숨에 미래로 이끌어버렸다.

남겨진 유산들

파울라 베커 작품 수집의 역사는 거울에 비친 20세기 역사의 슬픈 모습이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가치가 인정되자, 독일 각지의 박물관들이 그녀의 그림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1920년 당시 브레멘 미술관, 하겐의 폴크방 박물관, 하노버의 케스트너 박물관, 부퍼탈 에버펠트의 시립 박물관이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1927년에는 이 예술가를 위해 브레멘의 뵈트혀 슈트라세에 ‘파울라 모더존 하우스’라는 이름의 박물관이 생겼다. 이 박물관은 독일에서는 근대 예술가를 위한 첫 박물관이었으며 또한 여성 예술가를 위한 세계 최초의 박물관이기도 했다. 1930년대 초반에는 베를린 국립 갤러리와 근대 갤러리를 위시한 독일 각지의 미술관들이 그녀의 작품을 근대의 고전으로 간주하며 소장품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1937년에 들어와 나치에 의해 급격한 단절을 맞게 된다. 나치의 ‘퇴폐 예술’ 조치로 인해 피카소와 함께 “퇴폐 미술의 전형”이란 낙인이 찍혀버렸던 것이다. 국민화가에 대한 이런 재난은 한편으로 그녀 작품의 국제화를 가지고 왔다. 이른바 ‘외환 수익 매각’을 통해 그녀의 주요 회화 몇 점이 외국으로 팔려나갔으며, 결과적으로는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이름을 유럽을 넘어 세계로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영화]파울라 Paula, 2016

 

*개요:드라마 독일 123분 2017 .11.09 개봉
*감독:크리스찬 슈뵈초브
*카를라 주리(파울라 모더존 베커)
알브레히트 슈흐(오토 모더존)
조엘 바스만(라이너 마리아 릴케)


줄거리

독일의 예술가 공동체 보릅스베데에서 화가의 꿈을 키워 나가는 파울라.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 채 주위의 비웃음을 사기 일쑤다.
풍경을 스케치하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던 파울라는 인간의 신체에 관심을 가지고,
여성의 아름다운 몸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내는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그녀의 작품에 유일하게 칭찬을 건넨 촉망받는 화가 오토 모더존과 사랑에 빠지면서 인생의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세 점의 그림과 아이 하나, 내 인생은 축제가 될 거야”

ABOUT MOVIE 1

제69회 르카르노 영화제 화제작!
<내사랑><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에 이은 또 하나의 아트버스터!
위대한 여성 화가 ‘파울라 모더존-베커’의 일생을 다룬 최초의 전기 영화 <파울라>


영화 <파울라>는 우리에게 조금은 생소하지만, “피카소, 마티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장”(The NEW YORKER), “시대가 감당하지 못한 위대한 화가”(PARIS MUSEES), “진정한 여성의 모습을 그려낸 예술가”(NEW YORK PUBLIC LIBRARY) 등 여성 화가로서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독일의 예술가 ‘파울라 모더존-베커’의 삶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화가 파울라는 여성의 운명과 모성에 대한 생각을 단순화된 형태와 절제된 색채로 표현, 단순히 아름다운 작품이 아닌 자신만의 시각이 내포된 독특한 화풍을 창조해냈다. 특히, 서양 미술사에 처음으로 기록된 여성 화가의 누드 자화상을 그린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렇듯, 여성 화가에게 주어진 시대적 편견과 한계에 당당히 맞섰던 위대한 선구자 파울라의 인생을 최초로 담아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영화 <파울라>는 더욱 뜻깊은 의미를 지닌다. ‘여성’ 화가라는 틀에서 벗어나 진정한 예술가로 살고자 했던 파울라의 열정적이고 진실한 삶을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는 국내 개봉 전 이미 해외 영화제는 물론 숱한 해외 평단들의 호평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이처럼, <내사랑><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에 이은 새로운 아트버스터 <파울라>는 관객들의 마음속 짙은 여운을 안겨줄 걸작의 탄생을 확실하게 예고하고 있다.


ABOUT MOVIE 2

<블레이드 러너 2049> 카를라 주리의 색다른 변신!
<토니 에드만><가장 따뜻한 색, 블루> 제작진 참여!
스크린 위로 화려하게 부활한 위대한 예술가 ‘파울라’의 인생!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파울라’ 역할의 카를라 주리는 최근 개봉한 화제작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명배우들과 나란히 출연하며,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 배우임을 입증한 라이징 스타다. 자유분방한 매력을 지닌 동시에 인물의 감정을 섬세히 그려내는 탁월한 연기력을 지닌 카를라 주리의 눈부신 열연은 영화 속 캐릭터와 완벽한 시너지를 이뤄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또, <토니 에드만>,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등 감성 짙은 작품들을 총괄 담당하며 남다른 실력을 자랑했던 프로듀서 로렌스 클레르(Laurence Clerc)와 스벤 로젠크란츠(Sven Rosenkranz)는 <파울라>를 통해 시대가 감당하지 못했던 위대한 예술가의 삶을 재조명, 스크린 위로 화려하게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분장을 담당했던 마누엘라 왓츠코프(Manuela Watschkow)와 <프란츠> 속 고풍스러운 코스튬을 총괄했던 사빈 스틸(Sabine Still)은 시대를 재해석한 모던한 메이크업과 의상으로 영화 속 볼거리를 더했으며, <대니쉬 걸>의 감동을 배가시켰던 음악 프로듀서 세실 투어네트(Cecile Tournesac)는 파울리의 열정적이고 뜨거웠던 인생을 고스란히 닮은 음악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처럼, 각 분야 최고 실력자들의 오랜 노력 끝에 탄생된 <파울라>는 올가을 최고의 기대작으로 주목받으며 관객들의 기대를 완벽충족 시킬 예정이다.


ABOUT MOVIE 2

시인의 대명사 ‘릴케’부터 조각의 아버지 ‘로댕’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명작들을 만날 황홀한 기회!


릴케, 로댕 그리고 세잔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등장은 <파울라>의 관람을 부추기는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파울라와 특별한 우정을 나눴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지내던 파울라를 예술의 도시 파리로 이끈 장본인이다. 파울라에게 릴케는 진실한 대화를 나누던 소중한 벗이자, 그녀의 작품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끈끈한 관계를 증명하듯 파울라의 대표작 중 하나로 [시인 릴케의 초상화]가 꼽히기도 하는데, 초상화의 탄생 비화처럼 릴케를 그리는 파울라의 모습은 영화 <파울라>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명장면이기도 하다.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댕은 파울라의 또 다른 친구이기도 했던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의 스승으로 등장한다. 로댕의 조수로 일하는 클라라 베스트호프 덕분에 그의 작품을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파울라는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파울라의 대표작과 마찬가지로 스크린 위로 화려하게 펼쳐질 로댕의 작품은 <파울라>를 관람할 관객들에게도 색다른 즐거움을 안기며 영화의 재미를 더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실제로도 파울라의 삶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진 화가 폴 세잔은 그의 작품 [목욕하는 사람들], [인형을 안은 소녀] 등이 영화 속에 등장해 눈길을 끈다. 우연히 방문한 박물관에서 폴 세잔의 작품을 보게 된 파울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한 그의 작품에 단번에 매료되고 깊은 영감을 얻게 된다. 이렇듯 관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예술가와 작품들로 더욱 풍성한 볼거리를 자랑하는 <파울라>는 가을의 끝자락에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감성으로 물들일 것이다.


DIRECTOR INTERVIEW

Q: <파울라>의 감독을 맡게 된 계기?
A: 2012년 여름 절친한 프로듀서에게 대본을 받았다. 당시 영화는 제작이 꽤 진전된 상태로 대본을 본 순간 이 영화는 꼭 연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온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Q: <파울라>의 어떤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는지?
A: 파울라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두려움과 싸워나갔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갔다. 시대의 유리천장을 깬 놀라운 여성이다. 그녀가 보여준 강인함과 용기는 관객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많은 관객에게 정서적인 교감을 안길 것이라 확신한다.

Q: <파울라>를 작업하면서 중점에 둔 부분이 있는지?
A: 역사적인 고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피하는 편이다. 시대와 인물을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그 둘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이 내 스타일이다. 그래서 배우들이 최대한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모습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흐트러진 머리 모양새나 땀에 젖은 얼굴을 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말이다. 한가지 기억나는 것은 보릅스베데의 화가들을 지금에 비유하자면 힙스터에 가깝다. 그들의 모습을 좀 더 모던하게 표현하기 위해 현대의 의상을 사용하기도 했다.

 Q: ‘파울라’ 역할에 카를라 주리를 캐스팅한 이유는?
역사 속 인물을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때로는 고증과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캐릭터를 표현해내는 용기 있는 배우를 찾고 있었다. 또한,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우를 원했다. 그러던 중 자유분방한 카를라 주리가 문득 떠올랐다. 그녀의 연기는 자유분방함과 동시에 프로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게 매우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파울라 역할에 완벽히 들어맞는 배우라고 생각이 들어 캐스팅까지는 총 1년 반의 시간이 걸렸는데, 카를라 주리를 섭외하기 위해 그녀가 머무고 런던까지 직접 찾아가 2시간 동안 함께 일해 달라고 강하게 설득하기도 했다.

Q: 관객들이 <파울라>를 어떻게 보길 원하는지?
파울라는 매우 급진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정해진 길을 거부하고 새 길을 개척해냈다. 또한 파울라의 서정적이고 정열적인 러브 스토리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들이 겪었던 고충은 현대의 많은 커플이 겪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다 간 여성 화가 파울라를 통해 더욱 많은 관객들이 용기와 희망 그리고 공감을 얻길 바란다.

.

.

.

.

 

.

각기 다른 모두의 인생들이 제각각 짧기도 길기도 하겠지만

사는 동안 축제였기를 바라면서 ....

짧지만 화려한 축제였을 모두의 값진 인생들을 위하여.........p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