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Book./冊.冊.冊

- 冊,冊,冊.

 

 

 

 

 

 

창조적으로 분노하라

 

[책 속의 책-구본준 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 여는 글

“분노하라.”
한 구순 프랑스 노인의 외침이 수백만 프랑스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은 진정한 분노의 의미를 일깨웠기 때문이다. 우리 나이 아흔다섯살, 나치 독일에 맞서 프랑스를 지켰던 레지스탕스 정신으로 스테판 에셀은 젊은 세대들에게 일갈했다. “분노는, 저항이며 저항은, 창조”라는 것이다. 분노는 단순한 분개가 아니라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게 하는 창조적 고양이란 말이다.

우리는 정신의 에너지로 살아간다.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바라는 순수한 욕망이 우리를 이끌어간다. 좀더 나아져야 할 첫 번째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내가 바뀌지 않고 남을 바꿀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기 자신이란 소우주를 그 어떤 뿌듯함과 즐거움으로 채우려는 본능이다.

자기 자신을 좀더 나은 존재로 바꿔나가는 시작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이해하는 것부터다. 스스로는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한다. 남을 봐야 내가 보인다. 남의 이야기를 듣고, 남의 생각을 깨닫고, 남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았을 때 새삼 나 자신이 보인다.

책은 남을 통해 나를 일깨워주는 신비로운 통로다. 책을 읽으면 남들이 어떤지 알게 되고, 그들과 나는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된다. 일본의 책벌레 다치바나 다카시는 왜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느냐는 물음에 이유는 단 한 가지, ‘나 자신을 알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고 했다. 주체와 객체 모두를 밝혀주는 이 기능은 책이 지닌 진정한 마법이다.

책으로 만나는 모든 이야기는 다 남의 이야기지만 그 속에는 내가 들어 있다. 자신이 싫어하는 자신, 자신이 꿈꾸는 자신을 책에서 마주치게 된다. 남이 쓴 책 속에 담겨 있던 그 어떤 것이 당신과 주파수가 맞아떨어지며 등장한다. 책이 소중한 이유는 정답을 주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당신에게 질문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당신은 과연 누구인지 묻는 그 질문은 소설에도, 인문서에도, 만화에도 들어 있고 철학과 판타지와 재테크 정보에도 담겨 있다.

질문을 만날 때 우리는 자신에게 분노할 수 있게 된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분노가 아니라 마음이 절로 꿈틀대며 스스로에게 새로워지라고 일깨우는 창조적 분노, 즐거운 분노다. 분노할 일이 부쩍 늘어난 세상이다. 제대로 알아야 창조적으로 분노할 수 있다. 스테판 에셀은 그래서 “찾아서 분노하고 참여하라”고 주문한다. 그 분노가 당신을 오히려 행복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과 우리 사회, 동시대에 대해 창조적 분노를 느끼게 할 책들을 찾아 읽는 것은 온전히 우리 몫이다. 지난해 7월부터 올해 5월까지 출간된 책 중에서 주목받은 것들을 골랐다. 분노를 원했지만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창조는 분노에서도, 위안에서도 나온다. 책은 우리에게 이 두 가지 모두를 담아 건네주는 유일한 동반자다.
*...구본준 기자 한겨레 책·지성팀장 | copyright The Hankyoreh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지난해 7월~올해 상반기에 나온 꼭 챙겨봐야 할 책들

 

더욱 원숙해진 고수의 답사기

 

 이처럼 정직한 제목이 또 있을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감각적이고 세련된 요즘 책 제목들과 비교해보면 마치 100년 전쯤 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간단하다. 이 정공법 그 자체인 듯한 제목은 간단해서 본질적인 힘을 보여줬다. 전부 5권까지 나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260만여 부가 팔리며 ‘국민 답사기’로 자리잡았고, 이 책의 지은이 유홍준(62·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단숨에 스타 필자가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말을 유행어로 만들며, 우리가 애처롭게 보아온 한국 땅에도 가볼 곳은 많다는 것을 새삼 가르쳐준 덕분이었다.

 

10년 만에 돌아온 시리즈

 

이 베스트셀러 답사기가 돌아왔다. 5권이 나온 지 꼭 10년 만이다. 최근 나온 6권의 부제는 ‘인생도처유상수’. ‘세상 곳곳에 고수가 있다’는 뜻으로, 지은이 유 교수가 지은 말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명사가 된 뒤 문화재청장까지 지낸 유 교수는 재기발랄한 아이디어의 달인이란 호평과 함께 너무 튄다는 지적도 늘 함께 받아왔다. 지난 10년 동안 다양한 활동과 공직 생활을 하며 얻은 깨달음 때문일까. 세상은 넓고 배울 것은 많다는 이 글귀를 앞세운 6권은 한층 더 원숙해졌다. 책 자체도 이전 것들과 달리 컬러 사진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6권에서 유 교수가 찾아간 우리 문화유산은 경복궁과 전남 순천 선암사,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 그리고 정자고을의 경남 거창과 합천, 백제 문화권인 충남 부여·논산·보령이다. 지역과 문화재의 면면을 보면 진작에 다뤘어야 할 법한 국가대표급들이다. 한국 대표 문화재인 경복궁을 가장 먼저 다룬 것은 당연해 보이면서도 의미심장하다. 한국인과 외국인 누구나 가장 먼저 접하는 간판스타 경복궁처럼 할 이야기가 많은 곳도 없을 법한데, 동시에 이렇게 널리 알려지지 못한 곳도 없다는 말이다.

문화유산에 대한 일방적인 찬탄을 피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와 즐기는 법을 조근조근 이야기로 풀어주는 특유의 스타일로 유 교수는, 경복궁에 대해서도 목소리 높여 사랑하라고 강권하기보다는 우리의 오해와 무지를 부끄럽지 않게 일깨워주는 데 주력한다.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자금성과 경복궁을 비교하면서 중국과는 문화가 다르고 지형이 다른 우리나라에 들어선 가장 빼어난 궁궐이 경복궁임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문화재청장 시절 경복궁 복원 작업을 이끈 경험을 바탕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은 건청궁 등에 얽힌 이야기들이 들어가, 1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옛 모습을 되찾은 경복궁의 지금 모습을 충실하게 다루고 있다.

한국 유교 건축의 걸작으로 가장 매력적인 서원으로 꼽히는 도동서원을 소개한 부분도 반갑다. 동방오현의 한 명으로 조선 성리학 최고의 인물로 추앙받는 김굉필을 기리는 도동서원은, 그 규모는 오히려 다른 서원들보다 작지만 한국 유교사와 건축사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평가는 단연 최고 수준이다. 그럼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 서원, 그리고 김굉필이란 인물의 진면목에 대해 다룬 대중서는 많지 않았다.

 

자연에 대한 묘사 늘어

 

책 뒷부분은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삼은 부여와 그 부근 이야기다. 유 교수는 부여에 따로 집을 마련해 서울과 부여를 오가고 있다. 부여란 고장을 스스로 골라 고향으로 삼은 이유, 그리고 두 번째 고향에서 생활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단편적으로 들어서 알던 이야기들을 전체로 꿰고 엮어 새로운 이야기처럼 풀어내는 그의 글솜씨는 여전하다. 물론 달라진 점도 있다. 처음 이 답사기를 선보인 1990년대에는 40대 학자의 생생한 에너지가 도드라졌다면, 어느새 환갑 나이가 되어 쓴 6권에선 나무를 비롯한 자연에 대한 묘사가 많아진 것은 숨어 있는 특징이다.

6권에서 소개한 곳들은 모두 그가 개인적으로 인연을 맺었거나 마음의 빚을 느끼던 곳이라고 한다. 6권이란 장대한 시리즈가 되었지만, 그가 소개 못해 아쉬워하는 곳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충청북도와 경기도, 그리고 제주도인데 앞으로 펴낼 7권에서는 제주도에 대해 집중적으로 쓸 계획이란다....* 유홍준 지음, 창비 펴냄, 1만6500원

*...[책 속의 책] 구본준 한겨레 문화부문 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 | copyright The Hankyoreh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의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지난해 7월~올해 상반기에 나온 꼭 챙겨봐야 할 책들

한반도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정수일이라는 이름 석 자에는 늘 ‘실크로드’란 말이 따라붙는다. 풀바다에서 주옥을 건져냄을 뜻하는 ‘초양노옥’(草洋撈玉). 동서 문명교류사 연구의 대가 정수일(77)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이 ‘초원 실크로드’ 답사길을 떠나며 내내 움켜쥔 화두라고 한다.

 

풀바다에서 주옥을 건져내다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는 정수일 소장이 펴내는 실크로드 기행문 3부작의 두 번째 권이라 할 수 있겠다. 2006년에 펴낸 책 <실크로드 문명기행: 오아시스로 편>이 오아시스 육로를 걸은 성과물이라면,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는 초원길, 곧 초원 실크로드를 답사한 보고서다. 그는 2009년 7월까지 2년 동안 초원 실크로드의 전 노정을 대흥안령(大興安嶺) 초원로, 몽골 초원로, 동·서 시베리아 초원로, 네 구간으로 나눠 답파했다 한다.

초원 실크로드는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동서로 가로지른다. 흑해 동북쪽 남러시아에서 시발하여 카스피해 북안과 아랄해 남안, 그리고 카자흐 초원을 지나 알타이산맥 남록 중가리아분지에 닿는다. 다시 몽골 오르혼강 연안(고비사막 북단)을 지나 동남쪽으로 중국 화베이(화북) 지방과 대흥안령을 넘어 한반도까지 이어진다.

‘초양노옥’의 마음 기저에는 북방 초원 유목문명을 도외시해온 세간의 풍토에 대한 정 소장의 안타까움이 깔려 있다. “근 5천 년 전에 신석기시대를 갓 벗어난 에게해 지역의 애송이 문화를 에게문명으로 정의하면서, 이보다 3천 년 후에 완숙한 금속문화를 가꾼 북방 유목 기마민족들의 문화는 이른바 ‘중심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문화’로 비하하고 홀대해왔다.”

그의 초원길 답사는 그 문명과 교류의 진면목을 유물과 자취를 통해 드러내는 동시에, 그 길이 어떻게 한반도까지 이어졌는지를 찾는 여정이기도 했다. 초원과 유목, 기마, 그것을 다루는 인간. 이 넷이 초원문명과 초원 실크로드의 가치를 가늠케 하는 기본 요소라고 그는 말한다. 오아시스 육로와 해상로보다도 먼저 개통된 초원길은 역동적인 “유목 기마민족의 활(活)무대”였다.

그는 서양이나 이웃 나라에서 출간된 관련 서적이나 지도에는 한반도가 실크로드에서 제외되고 그 동단이 한결같이 중국에서 멎어 있음을 개탄한다. 해로는 중국 동남해안, 육로는 시안, 초원로는 화베이까지만 이어졌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다.

그는 이 통설이 어불성설이며, 문명교류를 이른바 서구문명중심주의나 중화주의로 재단하는 편견의 소산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 겨레의 역사적 뿌리를 북방 초원 세계에서 찾아야 한다”는 저간의 중론을 옹호하면서 실크로드가 한반도까지 닿지 않았다면 한반도에 있는 그 숱한 외래 유적·유물의 존재를 설명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

요체는 실크로드를 본디대로 한반도와 연결하는 것이다. 그는 이번 대흥안령 초원길 답사를 통해 그 교류길의 “초보적인 윤곽”을 그려냈다고 자부한다. 그는 한반도와 초원로를 이어준 길은 크게 두 갈래라고 본다. 중국 화베이 지방을 통한 간접 연결로와 몽골 초원에 바로 이어진 직접 연결로다. 그 두 갈래 길에서 환절 역할을 한 곳이 고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 대중관계의 요로 위치에 있던 영주(차오양)인데, 그는 ‘영주’에서 ‘주언까다뿌’로 이어지는 길을 답사하고 그 길이 바로 한반도와 북방 초원로를 직접 이어주는 길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 문명 교류를 증거하듯 그는 차오양 서북쪽 훙산문화의 심장부 츠펑에서 한국형 암각화와 유사한 암각화를 발견한다. 또한 두 문화가 공유하는 곰 토템도 확인한다. 츠펑을 떠나 북쪽으로 가는 길에선 우리네 성황당과 비슷한 ‘오보석’들이 심심찮게 서 있음을 목도한다.

 

삶, 그 자체인 실크로드

 

머나먼 ‘초원길 행각’에서, 정 소장이 퍼올리는 사유는 요사이 넘쳐나는 부박한 기행문들을 쑥스럽게 한다. 그는 아마 지금쯤 실크로드 3부작의 완결편인 해상로를 답사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평생 문명 교류를 천착해온 그에게 실크로드는 삶의 현장이요, 국가보안법에 갇혔던 세월도 옭아매지 못한 그의 삶 자체라 할 것이다....* 정수일 지음, 창비 펴냄, 2만3천원
*...[책 속의 책] 허미경 한겨레 문화부문 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 | copyright The Hankyoreh

 

 

 

 

<붓다의 치명적 농담>
<허접한 꽃들의 축제> 지난해 7월~올해 상반기에 나온 꼭 챙겨봐야 할 책들

 

발랄한 ‘금강경’ 당신에게 말을 걸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자신을 “띠풀로 덮인, 동아시아 고전의 옛길을 헤쳐온”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동아시아 고전 세계 중에서 특히 유학과 불교에 관한 연구서를 여럿 냈는데, 2008년에 <조선 유학의 거장들>과 <왜 조선 유학인가>를 펴냈고, 앞서 선불교의 화두를 설명한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를 썼다. 이번에 출간한 <붓다의 치명적 농담>과 <허접한 꽃들의 축제>는 불교에 관한 일종의 해설서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경전 가운데 하나인 <금강경>을 바탕으로 삼은 불교 강의가 이 책들이다.

별기’와 ‘소’의 화음

 

이 책들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별기’와 ‘소’라는 말이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의 부제는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이고, <허접한 꽃들의 축제>의 부제는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소’다. ‘별기’(別記)란 경전의 자구 자체에 얽매이지 않고 핵심을 전체적으로 파악해 해설하는 것이고, ‘소’(疏)란 경전의 문자를 하나하나 뒤좇으며 주석하는 것이다. 지은이의 표현으로 “경전의 언어를 축자적으로 충실히 따라가는” 것이 소의 방식이라면, “오해와 헛디딤의 위험은 크지만 과감한 해석과 체계를 제시하는” 것이 별기의 방식이다.

이 책들, 특히 <붓다의 치명적 농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문체다. 지은이의 문장은 통상의 불교 해설서에서 보기 어려운, 톡톡 튀는 발랄한 문장이다. 지은이는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일상적 언어의 지평 위에서 언설하고자 했다”고 밝혔는데, 불교 언어가 일상성과 현대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믿음을 <금강경> 한역본의 역사를 통해 설명하기도 한다. <금강경> 한역본은 5세기 초 인도 승려 구마라습(쿠마라지바)이 번역한 것과 7세기 ‘삼장법사’ 현장이 인도에 다녀와 번역한 것 두 판본이 대표적인데, 지금 우리한테 익숙한 것은 구마라습의 번역본이다. 구마라습은 중국 독자를 배려해 이해와 소통에 중점을 두었고, 현장은 원뜻에 충실한 딱딱한 번역을 택했다. 당대의 언어로 풀어준 것이 구마라습의 번역본이 채택된 이유였던 것이다.

 이어 지은이는 불교의 가르침 속으로 들어가 불교에 관한 흔한 오해들을 바로잡는다. 그런 오해 가운데 하나가 ‘삼계유심, 만법유식’이라는 말에서 드러난다. ‘삼라만상이 다 마음의 반영이요, 세상 모든 것이 다 의식의 결과일 뿐이다’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곧바로 이 세상은 마음이 만든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대승기신론>은 “마음이 일어나면 수많은 세계가 생겨나고 마음이 꺼지면 수많은 세계가 사라진다”고 설한다. 원효는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뒤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의식일 뿐이니, 마음 밖에 의식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라고 노래했다. ‘이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리지만, 지은이는 단언한다. “불교는 세계의 실재를 에누리 없이 긍정합니다!”

그렇다면 ‘오직 마음뿐’이라는 그 모든 말은 뭔가. 불교가 문제 삼는 것은 마음 밖에 따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그 실제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인간의 시선”이다. 불교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를 법(法)이라 하고, 주관적으로 인식한 세계를 상(相)이라 하는데, 문제는 이 ‘상’이 사람마다 마음마다 다르다는 사실이다. 마음은 사적인 관심과 욕망으로 세계를 왜곡한다.

 

‘상’(相)에서 벗어나 ‘공’(空)으로

 

이렇게 주관적으로 왜곡된 상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각자가 가진 것은 상(相)일 뿐, 법(法)이 아니라는 것, 우리 모두가 자아의 주관적 환상 속에서 그 편견에 의지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화들짝 깨닫는 일” 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 깨달음이 불교의 첫걸음이다. 그리하여 주관적 환상에서 벗어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지은이는 ‘공’(空)이라고 말한다. 공이란 마음이 비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자기의 이해·관심에서 해방된 상태가 공이며, 그때 공은 무아(無我)와 같다. 무아는 내가 본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주관적 환상에 집착하는 나로부터 떠난다는 뜻이다. 그렇게 무아 상태가 되면, 우리는 탐욕이나 분노에 휘둘리지 않고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책 속의 책] 고명섭 한겨레 에디터 부문 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 | copyright The Hankyoreh

 

 

 

쑤치시·웡치빈의 <동양을 만든 13권의 고전>

지난해 7월~올해 상반기에 나온 꼭 챙겨봐야 할 책들

 

방대한 대륙의 사상을 읽다

 

 <동양을 만든 13권의 고전>에서 동양은 좁혀 보면 중국이다. 중국 상하이문예출판사에서 1991년 엮어 펴낸 <둔세와 구세-중국문화명저신평>을 옮긴 책인데, 이 출판사는 ‘방대한 중국문화 전적’에서 13권의 저작을 골라 그에 천착해온 학자들에게 평론을 맡겼다. 책은 중국 학자 13명이 쓴 13편의 글로 이뤄졌다.

 

공자와 묵자의 사랑은 어떻게 다른가

 

중국을 빚은 13권의 고전으로 꼽힌 책은, 춘추전국시대(기원전 8~3세기) 사상가 공자의 <논어>에서 시작해 <묵자> <장자> <한비자> <손자병법> <사기> <논형> <육조단경> <몽계필담> <주자어류> <명이대방록>, 20세기 초 <쑨중산전집>에 이른다.

이 책에서 다수의 글들은 강도 차이는 있으되 고전의 사상체계와 그 사상가들을 그 시대의 역사적 맥락에서 분석하고 ‘거침없이’ 비판적으로 독해한다. 가령 요사이 국내에서도 새삼 학계와 독자의 주목을 받고 있는 공자를 보자. 지은이(쑤치시)는 중국 역사의 특징은 (주나라 이래) 가정마다 작은 땅을 경영하고 이를 통해 국가라는 큰 건축물을 지탱해온 데 있으며, 사회의 정치·경제·문화·심리 구조는 이런 기초 위에 세워졌다고 전제한 뒤, 공자 사상과 유학 연구도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나라 왕조의 종법 등급제도의 기초는 토지 분배인데, 등급의 상하·귀천의 척도는 바로 토지의 많고 적음이었다. 주 왕조는 천자-제후-경대부 등으로 층층이 위계 지어진 “방대한 가족”이었으며, “가족은 축소된 종법사회였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지은이는 공자가 평생 온힘을 다해 회복하려 애쓴 ‘이상’은 주나라 문화의 핵심인 주례(周禮)였으며, 그 기본 내용은 가족(국가) 내 종법 등급제도라고 말한다. 종법 등급제도에서 임금은 곧 아버지요, 부군(남편)은 곧 임금이다. 한 가족에서 각 등급 사이에는, 이를테면 부자·부부·장유·남녀·주노(주인과 노비) 사이에는 엄격한 차별이 유지돼야 한다. “이 차별이 가정에서는 토지, 재산, 기타 권리에 대한 가족 구성원의 차별로 드러난다.”

나아가 지은이는 공자 사상의 핵심이 인학(仁學)이 아니라 예학(禮學)이라고 주장한다. <논어>의 인은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이다. 곧 자기를 극복해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여기서 예는 바로 가정과 사회의 종법 등급 관계가 윤리화·제도화된 것이다. “공자의 ‘예가 아니면 보지 말라’는 말은 인간 사이에 등급 차별을 엄격히 준수하고 이를 넘어서지 말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전국시대 장자의 사상을 일러 “유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라 말한다. 공자가 인간세상의 등급과 차별을 유지하려 했다면, 장자는 인간세상을 초월하려 했으며 등급·차별을 없애고 무차별의 원시 혼돈 상태로 돌아가려 했다고 비판한다.

역시 이 대목에서 흥미를 끄는 건 춘추전국시대에 “커다란 영향력으로 유가와 맞섰던 학파” 묵가일 것이다. 지은이(웡치빈)는 묵자의 사상을 ‘천민에 의한, 천민을 위한 철학’으로 파악하고, 근대 사상가 량치차오(양계초)의 글을 빌려 묵자의 ‘겸애’(兼愛)와 공자의 ‘범애’(汎愛)를 비교·분석한다.

그가 보기에 공자의 범애는 “자기 집안을 사랑하면 역시 다른 사람의 집안도 사랑하게 된다”는 논리로 연역해낸 관념이다. 공자는 자기 자신(나아가 자기 집안·나라)과 타자 사이에는 차별이 없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묵자는 오히려 이런 차별 관념을 사회 죄악의 총체적 근원이라고 보았다. 자기의 이익을 얻으려면 먼저 반드시 남을 이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혼란을 다스리려면 차등을 없애야 한다고 묵자는 주장했다. 묵자의 또 다른 기둥인 ‘상현’ 사상은 정치의 귀족 종법 세습제를 무너뜨리고 귀족 아닌 하층 천인(賤人)들이 정치 무대에 오르는 길을 개척하기 위함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묵자 자신이 천인 계층인 공장(工匠) 출신이었다.

 

“거리두기식 지혜”라면 유용한

 

이 책의 초판은 1989년에 나왔다. 말하자면 이 책은 개혁·개방 사회주의 덩샤오핑 시대를 맞은 중국 학계가 당시 사회의 관심사로 떠오르던 유학을 비롯해 그 자신들의 밑동을 이뤄온 사상을 궁구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다시, 20여 년 시간을 건너뛰어, 중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중국 고전 읽기 붐이 형성됐다. 옮긴이가 썼듯이 “무조건적인 수용”보다는 “그 가치를 하나하나 검토하는 적당한 거리두기식의 지혜”가 필요하다면, 이 책은 그 유용함이 크다.
* 쑤치시·웡치빈 외 지음, 김원중 외 옮김, 글항아리 펴냄, 3만2천원
*...[책 속의 책] 허미경 한겨레 문화부문 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 | copyright The Hankyoreh

 

 

 

 

정민 교수의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지난해 7월~올해 상반기에 나온 꼭 챙겨봐야 할 책들

 

추사의 글과 맞바꾼 초의의 차

 

 “차 시절이 아직 이른 건가요? 아니면 이미 차를 따고 있는 건가요. 몹시 기다리고 있다오. 일로향실 편액은 적절한 인편을 찾아 보내도록 하겠소.”

제주도로 유배된 추사 김정희가 해남의 초의 선사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청하는 편지다. 이번에 선물하는 염주 세 꿰미에 더해 편액 글씨까지 써서 보내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차를 더 많이 받으려는 심산에서다. 추사가 써 보낸 편액은 현재 해남 대흥사에 걸려 있다.

 

다산초당, 조선 차 중흥시킨 산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인문학자 정민(한양대 국문학 교수) 선생이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라는 책을 냈다.

2006년 <동다기>(東茶記)라는 자료를 발굴하면서 쓰기 시작한 차 이야기가 모여서 묵직한 책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책의 무게 때문에 무겁던 마음이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가벼워지고 흥이 난다. 조선 차를 둘러싼 다채로운 이야기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히는데다 본문의 이해를 돕는 자료나 그림, 풍경 사진에서 색다른 재미를 느끼는 덕분이다. 책에 실린 자료들의 출처는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까지 넘나든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의 차 문화는 고려시대까지 성행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쇠락했다고 한다. 중국을 통해 들어오던 차의 보급이 중단됐고, 국내의 차 생산은 저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부안현감 이운해가 고창 선운사의 찻잎으로 7종의 향차를 만든 뒤 그 방법을 <부풍차향보>(扶風香茶譜)로 남겼고, 이덕리가 <동다기>에서 차 무역을 주장함으로써, 우리의 차 문화가 되살아날 계기를 얻었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 차를 중흥시킨 주역이었다. 유배지 강진에서 신병을 치료하려고 차를 마셨던 그는 다산초당에 정착하면서부터 차를 직접 만들었다. 다산이 이용한 차는 만덕산 백련사 주변의 야생차였는데, 채식 위주의 한국인에게 맞도록 야생차의 독성을 눅이는 제조법까지 개발했다고 한다. 다산이 만든 차는 오늘날 우리가 즐겨 마시는 잎차가 아니라 떡차란 사실도 밝혀졌다. 그동안 다산학의 산실로 알려져왔던 전남 강진군 다산초당이 이제부터 우리의 차 문화를 중흥시킨 산실로 조명받게 되었다.

초의 의순은 다산차의 제조법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길을 열었던 차박사다. 초의는 다산이 강진을 떠난 이후 본격적으로 차를 만들었고, 정조의 사위인 홍현주의 부탁으로 시 형식을 빌린 차 이론서인 <동다송>(東茶頌)을 지었다. 초의는 이 글에서 차의 역사와 우리 차의 효용, 차 마시는 절차와 방법까지 정리했다. 그는 다양한 모양의 떡차를 만들고 대껍질로 단단히 포장해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초의 차를 전국으로 알린 사람은 추사 김정희다. 그는 북경에서 완원(阮元)이 끓여준 차의 맛을 잊지 못하다가 초의 차를 만나면서 조선 차에 매료됐다.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보내라는 편지를 여러 번 보냈고, 유배길에 초의 선사가 머물던 대흥사 일지암을 방문한 이후 제주도에서 차를 배달받았다. 추사는 보답으로 글씨를 보냈는데, 일로향실(一爐香室), 죽로지실(竹爐之室), 명선(茗禪) 같은 명품 글씨들은 초의 차를 인연으로 하여 남게 되었다.

차로 유명해진 초의는 서울을 출입하며 당대의 명사인 정약용·김정희·신위의 집을 방문했고, 홍현주·신헌·허련을 만났다.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1830년 겨울 한강변의 수종사에서 열렸던 모임이다. 모임의 주인공은 초의와 정약용의 두 아들이고, 발문은 정약용·홍현주·이만용이 썼으며, 모임에 관한 기록은 신헌의 문집에 수록됐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명사들의 만남이 초의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술보다 차를 좋아했다는 홍현주는 친형 홍석주를 정약용과 연결한 인물이고, 김정희의 제자인 신헌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주역이다.

 

읽는 재미에 사료적 가치까지

 

이 책에는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자료의 원형 사진과 이를 탈초한 원문, 번역문이 모두 수록돼 있다. 차 이야기를 읽는 재미와 함께 자료집으로서의 가치가 크다는 뜻이다. 책의 부록에는 조선 후기의 차 문화 활동을 보여주는 연보가 있고, 찾아보기는 서명·작품명·인명·용어를 구분해 정리했다. 독자를 위한 편집자의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저자는 조선 후기의 차 문화사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의 차 문화사로 관심을 넓히겠다고 한다.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새로운 차 이야기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 정민 지음, 김영사 펴냄, 3만5천원
*...[책 속의 책] 김문식 단국대 교수·사학 | copyright The Hankyoreh

 

 

 

박상진의 <문화와 역사로 만나는 우리 나무의 세계 1·2>
지난해 7월~올해 상반기에 나온 꼭 챙겨봐야 할 책들

 

뿌리 깊은 나무에 깃든 한국사

 

나무의 뿌리는 인간만큼 깊다. 이 땅 5천 년 역사의 현장에서 벌어진 온갖 인간의 삶을 지켜보며 함께 살아온 것이다.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서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마을 어귀의 고목은, 그 자체로 문화이자 역사라 할 수 있다.
우리 농촌의 대표적인 풍경에 꼭 등장하는 마을 어귀 아름드리 고목의 대부분은 느티나무다. 산림청의 지도·감독을 받아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리하는 고목은 현재 1만3천여 그루인데, 느티나무가 7100여 그루로 가장 많다. 그래서 느티나무에 얽힌 이야기도 많다.

 

나무에 얽힌 문화와 역사

 

고려 말 문신 최자가 쓴 <보한집>에 나오는 전북 임실의 의견(義犬)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술에 취해 잠든 주인이 들불에 휩싸일 위기에 처하자, 개가 연못을 들락거리며 자신의 몸을 물에 적셔 불길을 막고 숨졌다는 이야기다. 감동한 주인이 개를 정성껏 묻어주고 지팡이를 꽂아뒀더니, 거기서 싹이 트고 자라 큰 느티나무가 됐다고 한다. 경남 의령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곽재우 장군이 북을 매달아놓고 군사훈련을 했던 ‘현고수’란 느티나무가 있다. 충북 괴산에는 백제군에 성을 뺏긴 신라의 성주가 느티나무에 부딪혀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느티나무 ‘괴’(槐)자를 넣은 지명을 쓰게 됐다고 한다.

어디 옛이야기뿐이랴. 천마총의 관재도 느티나무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해인사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법조전 등 많은 문화재와 사찰의 전부 또는 일부가 느티나무다. 느티나무만 봐도, 나무가 얼마나 우리 역사와 문화 곳곳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문화와 역사로 만나는 우리 나무의 세계>는 우리나라 문화와 역사 속에 등장하는 나무들에 대한 백과사전이다. 지은이인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는 나무 문화재에 관해 우리나라의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그는 연구실 학문에서 벗어나 우리 문화와 역사 속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대중적 소통을 하는 활동에 주력해왔다. 이 책은, 자연과학적 연구와 인문학적 접근이 어우러진 그의 활동이 집대성된 것이라 할 만하다.

1천 종이 넘는 우리 나무 가운데 242종을 골라내고, ‘꽃이 아름다운 나무’ ‘과일이 열리는 나무’ ‘약으로 쓰이는 나무’ ‘생활에 쓰이는 나무’ ‘가로수로 심는 나무’ ‘정원수로 가꾸는 나무’ ‘재목으로 쓰이는 나무’ ‘만나기 어려운 귀한 나무’ 등 여덟 분야로 나눠 각각의 나무에 대해 설명했다. 또 <삼국유사> 등 4대 역사서는 물론, 중국·일본의 역사서, 옛 선비들의 문집에서부터 개화기의 문학작품까지 다양한 자료를 두루 참조했다. 이를 바탕으로 나무의 생태학적 설명과 함께 나무와 그 이름의 유래, 열매·목재의 쓰임새, 나무에 얽힌 문화와 역사 등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눈이 즐거운 사진과 그림들

 

퇴계 이황은 매화를 너무 사랑해 “저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철쭉은 그 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나가던 나그네가 자꾸 걸음을 멈춘다’는 말을 아예 그 이름의 유래로 삼는다. 팔만대장경에 쓰인 나무는 자작나무로 알려졌으나, 산벚나무의 재질이 가장 많다고 한다.

특히 대부분 지은이가 직접 찍은 700여 장의 나무 사진과 김홍도·신윤복 등의 옛 그림 50여장, 각 단락에 그려넣은 나무 그림 등 볼거리가 풍성해서 눈이 즐겁다. 나무의 모습과 그 이야기를 함께 눈에 넣어두면, 나중에라도 더 친근하고 반갑게 나무들과 사귈 수 있을 듯하다.
* 박상진 지음, 김영사 펴냄, 각 권 3만원
*...[책 속의 책] 최원형 한겨레 문화부문 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 | copyright The Hankyoreh 

 

 

 

노명우 교수의 <호모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
지난해 7월~올해 상반기에 나온 꼭 챙겨봐야 할 책들

 

놀이하는 일상이여 돌아오라

 

 아마, 다들… 놀고 싶을 거다. 여행이든, 노래든, 운동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하지만 책상에 앉아서 ‘노는 상상’을 하다 보면, ‘이럴 시간에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하는 자책감이 들기 십상이다. 당연하다. 개미처럼 일해야 하고 베짱이처럼 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호모파베르’(만드는 사람)의 교육환경 속에서 자랐으니까. 이렇게 놀고 싶은 욕망과 공부해야 한다는 의무가 충돌할 때 “인간의 본원적 특징은 사유나 노동이 아니라 놀이다”라는 말은 얼마나 매력적인 위안으로 다가오는지.

 

해도, 안 해도 그만인 놀이가 만든 예술

 

20세기 사상가 하위징아의 <호모루덴스>는 그런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는 호모파베르가 지배하는 세계를 비판했다. 나아가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를 통해 ‘놀 줄 모르는 병든 근대’의 탈출구를 제시하려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청소년·일반 독자가 읽기엔 상당히 학술적이다. 그래서 사회학자 노명우 아주대 교수가 하위징아의 책을 쉬운 사례와 해설로 재구성한 <호모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를 펴냈다.

저자는 하위징아가 언급한 사례에 따라, 때로는 원저에 없는 예를 들어가며 독자를 ‘호모루덴스의 시대’로 안내한다. 고대인들은 재판, 결혼과 같은 중대한 결정을 제비뽑기나 결투를 통해 내렸다. 놀이를 통해 신의 뜻, 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고대철학은 지혜를 겨루는 수수께끼 놀이에서 시작됐고,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중세 기사들은 마상시합에서 피를 흘렸다. 호모루덴스들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놀이’에 운명과 목숨을 걸었으며, 명예와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그리고 이런 과잉이 문명을 만들었다. 피라미드가 단지 기능적인 무덤이었다면, 그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피라미드에는 사유나 노동을 뛰어넘는 어떤 것이 있다. 하위징아는 그것이 놀이라고 생각했다. 밥을 담고, 몸을 가리는 기능 이상을 원한 호모루덴스의 열정이 도자기와 패션을 만들었다. 예술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호모루덴스가 자신과 벌이는 경쟁을 통해 발전했다.

과거의 사례들을 보면, 현재의 우리는 호모루덴스와 교차점을 찾기 힘들어 보인다. ‘놀이정신’은 왜 사라진 걸까? 19세기는 대전환의 시대였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했다. 명예와 아름다움을 위한 놀이 경쟁은 이윤 극대화를 위한 전쟁으로 바뀌었다. 호모파베르는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인간형이었다. 하위징아는 이를 놀이정신의 쇠퇴로 읽었다. 나치즘은 떼지어 저급한 행동을 일삼는 타락한 놀이정신의 대표적 사례였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는 <호모루덴스>의 단순한 해설서이기를 거부한다. 호모루덴스를 통해 19세기를 ‘진보가 아닌 퇴행’으로 비판한 하위징아의 문제의식은 효과적이었다고 판단하지만, 소수 귀족만 누렸던 놀이정신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그린 ‘귀족적 시각’은 반대한다.

현대사회에서 놀이는 신분적 특권이 아니라, 노동 이외의 시간에 ‘노동의 대가’로 주어진다. 그렇다고 현대인들이 퇴근 뒤 자유시간에 과거 호모루덴스들의 놀이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현대 세계에는 노래방·놀이공원처럼 ‘잘 짜인 놀이 세계’를 돈 받고 파는 서비스가 성행한다. 진정한 놀이라기보다는 노동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수단이며, 호모파베르라는 자각을 잠시 잊게하는 마취제일 뿐이다.

 

디지털 세계를 현대적 놀이터로

 

지은이는 시장의 일방적 지배, 교환관계를 바로잡아야 호모루덴스의 귀환도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리눅스의 ‘오픈 소스’ 운동이나 위키피디아 같은 디지털 세계의 놀이에서 변화와 희망의 단서를 찾았다. 지식의 판매자와 구매자의 분화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 숨어 있는 오타쿠와 고수들에게 ‘놀이터’를 제공해 사회와의 연결망을 만들고, 이를 통해 놀이가 일상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설명이다.
* 노명우 지음, 사계절 펴냄, 1만2천원
*...[책 속의 책] 전정윤 한겨레 에디터부문 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 | copyright The Hankyoreh

 

 

 

철학자 김용규씨의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지난해 7월~올해 상반기에 나온 꼭 챙겨봐야 할 책들

 

'천지창조'는 종교적 문제작이다?

 

 철학자 김용규씨가 쓴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은 ‘신’이라는 코드를 풀어 서양 문명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대담한 지적 도전이다. 지은이는 신이라는 존재가 서양문명의 심장부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심장에서 뻗어나간 핏줄이 문명의 세포 단위까지 퍼져 있기 때문에, 신을 이해하면 서양문명을 근본부터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독일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지은이는 자신이 벼린 두 지적 무기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서양의 철학과 신학이 어떻게 만나 어떤 교호작용을 거쳐 어떤 결과를 냈는지를 넓고도 깊게 탐색한다.

 

히브리 신의 형상은 그릴 수 없다

 

지은이는 서구 역사에서 문명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 사건의 주인공으로 콘스탄티누스를 거명한다.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막센티우스와 서로마제국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그해 10월28일 그가 군사를 이끌고 로마 테베레강에 도착했을 때, 하늘에 갑자기 십자가가 나타나고 그 위로 “이 표적으로 이기리라”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이 환영을 본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 군대를 쳐부수고 서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이때부터 로마군의 방패와 깃발에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휘장이 그려졌다. ‘라바룸’이라 불리는 이 휘장이 새겨진 로마군 깃발은 “서양문명의 중심축이 헬레니즘에서 헤브라이즘으로 옮겨가는 것을 알리는 징표이자 신호탄”이었다. 이어 제국을 지배하던 수많은 그리스·로마 신들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기독교 신이 차지했다. 한편 기독교 신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는 그리스 철학이 활용됐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하나로 합쳐친 것이다. 그러나 서양 정신을 이룬 이 두 문명은 근원적으로 상충하는 성격을 품고 있어, 틈만 나면 갈등이 불거졌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 갈등을 얼핏 보여주는 것이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그린 시스티나 천장화 <천지창조>다. 이 천장화에서 미켈란젤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장면은 ‘아담의 창조’인데, 여기서 흰 수염이 무성한 백발의 신이 갓 창조된 아담에게 영혼을 불어넣으려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작품은 신학적·종교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백발의 노인은 기독교의 신 야훼가 아니라 그리스 신화의 주신 제우스의 모습이다.

지은이는 히브리인들이 신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그려내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구약성서 속의 신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조차 꺼린다. 그가 마지못해 자기 이름을 밝히는 곳은 ‘출애굽기’ 3장 14절인데, 여기서 그는 자신을 히브리어로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라고 밝힌다.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 성서>는 그 말을 “나는 있는 자다”라고 옮겼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본디 말뜻 그대로 옮기면 “나는 있다”라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구약성서의 신은 구체적인 존재물(존재자)이 아니다. 그는 규정할 수 없고 지칭할 수 없다. 신의 이름인 ‘야훼’도 ‘그는 있다’ ‘그는 존재한다’라는 뜻이라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요컨대, 구약의 신은 규정할 수 없고 한정할 수 없기에 이름이 없는, 모든 존재자 일체를 포괄하고 초월하는 ‘존재 자체’를 뜻한다.

 

신이 죽은 시대, 인문학이 해야 할 일은?

 

이렇게 이해되는 히브리 신은 사람의 모습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신의 형상을 그려볼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신을 형상화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 지은이는 성서 속의 묘사들을 조합해 히브리인들이 생각한 신을 이렇게 그려낸다. “시간도 끝도 없는 어떤 무한한 바다가 있다. 그 바다는 가만있지 않고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출렁이는데, 그 안에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에 따라 무수한 물방울들이 생겨났다 사라진다.” 지은이는 이 무한한 바다가 기독교의 신이며, 거기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물방울들이 세상 만물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신을 둘러싸고 벌어진 서양문명사의 대논쟁들, 그 문화적 파생물들을 추적한다. 지은이는 오늘날 삶에 근원적 의미를 주던 그 신이 죽어버린 뒤, 가치의 몰락과 의미의 소멸로 인간이 고통받고 있다면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오늘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 김용규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3만7천원
*...[책 속의 책] 고명섭 한겨레 에디터 부문 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 | copyright The Hankyoreh

 

 

 

아리스토파네스의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1·2>
지난해 7월~올해 상반기에 나온 꼭 챙겨봐야 할 책들

 

열렬한 평화주의자의 웃음을 통한 사회진단

 

 그리스 3대 비극작가(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전집을 옮긴 바 있는 그리스·라틴 고전 번역가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가 이번에는 그리스 희극의 대표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45?~380?)의 희극 전집을 번역해 두 권으로 펴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모두 40여 편의 작품을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중 11편이 온전히 전한다. 이 번역 전집에 11편이 모두 담겼다. 기원전 5세기에 만들어진 그리스 ‘고희극’ 수백 편 가운데 현전하는 것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이 작품들뿐이다.

 

보수적으로 신랄하게

 

아리스토파네스는 페리클레스가 아테네를 이끌던 민주주의 전성기에 태어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기원전 431~404)에 주로 활동했다. 그는 공동체의 전통적 가치관을 존중하고 유지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던 듯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보수적 관점을 드러내는 장으로 삼아, 새로운 흐름이나 위험한 경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특히 당대의 유명 정치인이나 지식인을 표적 삼아 실명으로 혹은 익명으로 가혹하게 풍자했다.

특히 소크라테스를 일종의 ‘지식 사기꾼’으로 그린 <구름>이라는 작품은 직접적인 인신공격이다. 이 작품은 소크라테스를 그른 것도 옳은 것으로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악질 소피스트로 묘사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보수적인 눈에는 상대주의적 요설로 가치 기준을 어지럽히는 소피스트나, 낡은 신념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모두 가차 없이 비판해 아테네의 ‘등에’(Gadfly·잔소리꾼) 노릇을 하던 소크라테스나 똑같이 공동체의 안정을 흔드는 부류로 보였던 것이다. 놈팡이 아들 때문에 막대한 빚을 진 <구름>의 주인공 남자는 아들을 소크라테스에게 보내 교묘한 논리와 말솜씨를 배워오게 한다. 그리하여 채권자들을 따돌리고 돈을 갚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번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두들겨 패고 나서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운 논리로 자신이 정당함을 입증하기에 이른다.

<구름>은 애초 기원전 423년에 써서 그해 경연에 냈던 작품인데, 거기서 꼴찌(3등)를 하는 바람에 몇 년 뒤 다시 고쳐 썼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이 개작 판본이다. 희극 장르의 중간에는 ‘파라바시스’(앞으로 나섬)라는 장치가 있는데, 배우들이 모두 퇴장한 상태에서 코로스(합창대)와 코로스장이 앞으로 나서서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다. “나는 사실 여러분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관객이며, 여기 이 희극이야말로 내 희극들 중 가장 지혜로운 작품이라 믿었소. 그래서 내게 가장 많은 노고를 안겨주었던 이 희극을 맨 먼저 감상하도록 내놨으나, 부당하게도 하찮은 자들에게 져 물러났소.” 파라바시스에서는 통상 작품의 플롯과 무관한 주제로 관객과 이야기하는데, 이 작품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관객에게 ‘왜 내 작품을 안 뽑아주었느냐’고 서운한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다.

<리시스트라테>(기원전 411)는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중 내용이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섹스파업’이라는 센세이셔널한 가상의 사건을 그렸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계속돼 도시가 피폐해지자 아테네의 여자들이 적국 스파르타의 여자들과 공모해, 남자들이 전쟁을 끝내는 그날까지 잠자리를 거부하기로 결의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은 해학·조소·야유·풍자의 성찬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특히 외설스런 표현이 거의 포르노그래피에 육박한다. 파업 지도자 리시스트라테가 여자들을 앞에 놓고 “앞으로 우리는 남근을 삼가야 해요”라고 말하자, 여자들이 일제히 대든다. “난 못해요. 전쟁이야 계속되든 말든.”

 

은밀한 일상의 희극적 묘사

 

이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2400년 전 아테네라는 고대도시의 일상생활, 아니 은밀한 사생활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생히 그려보게 해준다. “아모르고스산 속옷을 입되 아랫도리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삼각주의 털을 말끔히 뽑은 채 남편들 앞을 지나가면 남편들은 발기되어 하고 싶을 거예요. 그때 딱 잘라 거절하는 거예요. 그러면 남편들은 서둘러 휴전하게 될 거예요.” 바로 이 생동감 넘치는 묘사의 활력이 아리스토파네스를 최고의 희극작가로 만든 힘일 것이다.
* 아리스토파네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펴냄, 각 권 2만5천·2만8천원
*...[책 속의 책] 고명섭 한겨레 에디터 부문 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 | copyright The Hankyoreh

 

 

 

노르망 바야르종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
지난해 7월~올해 상반기에 나온 꼭 챙겨봐야 할 책들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붉은색 사과를 본 사람은, 그 사과를 비추는 조명을 바꿀 경우 사과 빛깔이 달라지는데도 여전히 붉다고 생각한다. 신경학자 테런스 하인스의 실험이다. 사과를 상자 안에 넣고 그것이 사과라는 걸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일부분만 보이게 조그만 구멍을 뚫어 피실험자에게 보여준다. 그런 뒤 그 사과를 비추는 조명을 바꾸고 다시 그것을 보여주면 피실험자는 그걸 다른 색으로 인식한다. 상자 속의 사과가 사과인 줄 몰랐기 때문에 ‘사과는 붉은색’이라는 배경지식(고정관념)에 좌우되지 않은 것이다.

 

권위와 다수에 반하여

 

나폴레옹이 말한다. “주세페, 저 병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나? 터무니없는 소리만 해대는데.” “폐하, 저 병사를 장군으로 승진시키십시오. 그럼 그의 말이 흠잡을 데 없이 들리실 겁니다.” 이건 ‘권위에 호소하기’의 역설이다. ‘군중에 호소하기’도 있다. 예컨대 “×를 마셔보세요.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맥주니까!” 같은 광고문구들이 대표적이다. 그 맥주가 가장 많이 팔리고 있다는 게 그것들의 품질이 가장 좋다는 걸 보장하진 않는다.

“사람들은 왜 <××일보>를 가장 많이 볼까요?”라는 광고문구도 다르지 않다. 부분이 옳으면 전체가 옳다고 주장하는 ‘구성의 오류’, 그 반대로 전체가 옳으면 부분도 옳다고 주장하는 ‘분할의 오류’도 있다.

대안적 가치를 추구해온 캐나다 퀘벡대학 교육학과 교수 노르망 바야르종의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은 이런 흥미로운 사례를 무수히 제시한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신비주의나 초과학, 뉴에이지 등이 횡행하고 학계와 지식계가 성찰과 판단력과 합리성을 잃어버린 채 추락해버린 현실이 야기하는 인식론적 문제, 그리고 정치적 문제를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민주시민으로서 이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것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충분하게, 또 다양한 방향에서 제공받고 있을까? …많은 사람이 걱정하듯이, 나도 어느 한 방향으로 쏠린 언론의 실상이 걱정스럽다.”

그는 “고객 중심의 사고방식과 경제지상주의”가 판치는 교육계도 참여민주주의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 심각한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교육’을 ‘세뇌’로 바꿔 읽는 것이 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다는 노엄 촘스키의 얘기에 동의한다. 이 책은 이런 현실에 사람들이 비판적 사고로 맞설 수 있도록 해주는 기초적인 생각의 무기, 성찰의 수단을 제공하겠다는 의도로 쓰였다. 원래 제목 ‘Petit Cours D’Autodefense Intellectuelle’은 ‘지적인 자기방어 능력을 키우기 위한 단기 코스’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비판적 사고 훈련 입문서다. 따라서 어렵지 않다. 언어, 숫자, 경험, 과학, 미디어 등 5개 장으로 나눠 요령 있게 펼치는 악성 프로파간다 깨부수기 훈련 과정은 흡인력이 있다.

통계상의 표준편차를 설명한 뒤 이런 예를 든다. 1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지지도는 53%였는데, 3월의 같은 여론조사에서는 56%였다. 이를 토대로 대통령 지지율이 올라갔다고 보도해도 문제가 없을까? 이 조사의 정확도가 95%, 표준오차 범위 ±5%라면 그 보도는 거짓일 수 있다. 이 표준오차 범위라면 1월 지지율은 48~58%고 3월은 51~61%다. 따라서 1월에 58%였던 지지율이 3월엔 51%로 추락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숫자의 이면을 읽어라

 

‘숫자 공포증을 치유하는 10가지 비법’에는 이런 얘기도 있다. 지난해 ㄱ시와 ㄴ시에서 각각 50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5년 전엔 ㄱ시에 42건, ㄴ시에선 29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5년간 두 도시의 살인사건 증가율을 백분율로 표시하면 ㄱ시는 19%, ㄴ시는 72%다. 따라서 ㄱ시 쪽 치안이 더 나을까?

지은이는 신문을 볼 때 이것만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ㄱ시는 지난해 인구가 60만 명이었고 5년 전에는 55만 명이었다. ㄴ시는 지난해 80만 명, 5년 전에는 45만 명이었다. 따라서 인구증가 속도까지 고려해 지난해 살인사건 발생률은 ㄱ시가 10만 명당 8.33명, ㄴ시가 10만 명당 6.25명이었다. 따라서 ㄴ시가 오히려 더 안전하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까지만 봐서도 안 된다. 5년 전 두 도시의 살인사건 발생률을 마찬가지의 인구비례로 계산하면 ㄱ시는 10만 명당 7.64명, ㄴ시는 10만 명당 6.44명이다. 따라서 5년 전과 지난해를 비교하면, ㄱ시는 증가율이 높아졌고 ㄴ시는 낮아졌다.
* 노르망 바야르종 지음, 강주헌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1만3500원
*...[책 속의 책] 한승동 한겨레 논설위원 추천하는 인문서 | copyright The Hankyoreh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지난해 7월~올해 상반기에 나온 꼭 챙겨봐야 할 책들

 

평화적으로 봉기하라

 

 분노하라! 90대 노투사의 외침이 프랑스 전역을 뒤흔들고, 마침내 한국에 상륙했다. 지난해 10월 프랑스의 한 영세 출판사에서 초판 8천 부를 찍은 소책자 <분노하라>는 그 뒤 7개월 만에 무려 200만 부를 돌파하며 신드롬을 일으켰고, 세계 각국으로 판권이 팔려나갔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표지를 포함해 34쪽에 불과한 이 ‘팸플릿’의 지은이는 올해 세는 나이로 아흔다섯인 스테판 에셀.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반(反)나치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붙잡혀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집행 직전 극적으로 탈출한 전력의 소유자다. 그가 망백(望百)을 넘어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나이에 새삼 목소리를 높인 까닭은 무엇일까.

“이른바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도 일찍이 없었다.”
에셀이 보기에 2010년의 프랑스는 자신이 레지스탕스로 싸우면서 꿈꾸었던 자유 프랑스의 모습에서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물론, 나치라는 악과 자유 프랑스라는 선의 구분이 분명하던 60여 년 전에 비해 상황이 한층 복잡해진 오늘날 분노의 대상이 불분명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에셀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호소한다. 주변을 둘러보라고. 그러면 분노의 대상이 보일 것이라고. 에셀이 말하는 분노를 단순한 감정의 폭발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보다는 ‘참여 의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분노의 이유들은 어떤 감정에서라기보다는 참여의 의지로부터 생겨났다.”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지표와도 같은 앙가주망(참여)을 떠오르게 하는 구절인데, 실제로 사르트르는 에셀이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스승 같은 선배’였다.

이렇듯 분노를 통한 참여를 강조하는 에셀이 보기에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분노와 참여를 차단하는 무관심이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다. 그는 한국어판 출간에 즈음해 번역자와 행한 전자우편 인터뷰에서도 젊은이들이 일단 지지 정당에 투표할 것과 시민단체에 참여할 것을 강조했다.

유대계 독일인으로 태어나 7살 때 프랑스로 이주한 에셀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점도 눈길을 끈다. 모두 6개 장으로 이뤄진 이 소책자의 한 장이 ‘팔레스타인에 관한 나의 분노’라는 제목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할애됐다. 그는 2008년과 2009년 외교관 여권을 이용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방문하고 돌아와 그곳 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관해 증언한 바 있다.

이 책에서도 그는 “유대인들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전쟁범죄를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어떤 민족이 자신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예는 지금까지 찾아보기 힘들다”고 개탄했다.

 

창조의 저항, 저항의 창조

 

이처럼 분노의 이유를 찾아내고 그것을 참여로 이어나가자고 역설하면서도, 그 방법은 어디까지나 비폭력이어야 하며 그쪽에 더 희망이 있다고 에셀은 힘주어 말한다. 그는 “폭력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수단 또한 폭력이라는 것도 사실”이라는 선배 사르트르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비폭력이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더 확실한 수단”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결국 그가 강조하는 것은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이기도 한 ‘평화적 봉기’다.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선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21세기를 만들어갈 당신들에게 우리는 애정을 다해 말한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돌베개 펴냄, 6천원
*...[책 속의 책] 최재봉 한겨레 선임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 | copyright The Hankyoreh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지난해 7월~올해 상반기에 나온 꼭 챙겨봐야 할 책들

 

잃어버린 30년을 넘어 다시 복지국가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죽음에 임박한 한 역사학자가 이 시대에 던지는 통렬한 유언장이다.
토니 주트(1948~2010)는 2006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현대사를 분석한 역사서 <포스트워 1945~2005>를 통해 ‘미국적 생활양식’에 대비되는 ‘유럽식 사회모델’을 유럽의 성공 요인으로 ‘통찰’해 미국과 유럽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토니 주트는 2008년 루게릭병을 진단받았다. 그의 몸은 점점 마비됐고, 의료장비의 도움을 받아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까지 악화됐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집필된, 정확히는 지인들이 그의 구술을 받아 입력해 완성된 책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국가, 어떤 정부를 선택하고 만들어야 하는지를 화두로 삼은 이 책에서 그는 유럽과 미국의 사례를 역사 속 당대 현실에서 천착하며, 1989년 세계 공산주의 진영이 몰락한 때부터 세계 경제위기(2008)가 몰아친 2000년대까지 최근 30년을 자유시장을 앞세운 ‘신자유주의’의 시대로 파악한다.

 

노학자의 빛나는 역사적 통찰

 

그가 보기에, 1970년대에 발아해 ‘공공부문에 대한 경멸과 규제받지 않는 시장, 민영화·민간부문에 대한 숭배’로 특징지어지는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쓴 이 30년은 ‘잃어버린 30년’이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대전 뒤 유럽 나라들이, 대공황기 미국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사적 영역의 실패를 공적 영역을 통해 해결한 성과와 그 모든 노력을 이 30년 동안 무위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사적 영역을 특권화하고 공적 영역을 무시한 극단적인 탈규제 정책의 진원지는 미국과 영국이었다. 문제는 그 어떤 나라도 지난 30년간 ‘경제 관리’와 ‘복지’ 파괴에 앞장서온 미·영 두 나라에 맞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1968년 GM 대표가 벌어들인 소득은 GM 노동자의 66배였지만, 오늘날 월마트 대표는 월마트 노동자의 900배에 달하는 돈을 벌 만큼 미국의 빈부 양극화는 극심해졌다.

이 시기에 탈규제가 심한 나라일수록 부유한 소수와 가난한 다수 사이의 격차는 더욱 커졌고, 사회문제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문제는 국가가 얼마나 부유한지가 아니라 국가 내부의 불평등이 얼마나 큰지였다. 선성장론(후분배론), 곧 번영과 특권은 파이 크기가 커지면 자연스레 (다양한 계층으로) 확산된다는 견해에 대해 저자는,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함을 보여준다.

이 책의 훌륭한 점은 역사학자로서 멀리는 19세기, 가까이는 20세기 유럽·미국의 정책들을 들여다보며 역사적으로 통찰한다는 데 있다. 케인스와 루스벨트가 주도한 미국의 뉴딜정책, 전후 유럽 스칸디나비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뤄낸 복지국가, 전후 영국의 사회보장국가 등은 빈부 격차 해소와 사회적 불평등 억제에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1945년 이후 1980년대까지 약 30년간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서 빈부 격차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중산층은 무상교육, 무료(저가) 의료 혜택, 공공연금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빈민층과 함께 똑같은 혜택을 누리는 대신 자신들의 세금으로 이 비용을 충당한 결과 1960년대에 가처분소득이 1914년 이래 사상 최대에 이르렀다. 지은이는 “세상이 그렇게 잘 돌아간” 까닭을 시장의 마술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데서 찾는다. 곧 정부가 시장을 규제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회주의’란 말이 금기처럼 돼 있고 공공 목적의 재정지출을 옹호하는 논객들마저 ‘자유주의자’(리버럴)를 자처하는 미국에서 지내온 역사학자로서 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쓴 책이지만, 그 목소리는 미국식 사회모델이 횡행하는 한국 사회의 독자에게도 절절한 울림과 함께 직접적 문제제기를 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당신이 원하는 국가는?

 

지은이는 2008년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최악의 적이 다름 아닌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 자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었다고 단언한다. 그의 열쇳말은 ‘큰 정부’ ‘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다. 요약하면, 사민주의에 입각한 강력한 복지국가다. 이 역사학자가 격정적 어조로 토해내는 이야기는, 우리는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와 나는 어떤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는가? 우리가 원하는 국가는 어떤 종류의 국가인가?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토니 주트는 2010년 3월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뒤 그해 8월 뉴욕에서 숨졌다.
* 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 1만3천원
* 허미경 한겨레 문화부문 기자 서평
*...[책 속의 책] 구본준 한겨레 문화부문 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 | copyright The Hankyoreh

 

 

 

 

 

정혜경의 <조선 청년이여 황국 신민이 되어라>
지난해 7월~올해 상반기에 나온 꼭 챙겨봐야 할 책들

 

물자처럼 공출됐던 조선인들

 

 <조선 청년이여 황국 신민이 되어라>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저질러진 ‘강제동원’의 얼굴과 그 참혹한 피해상을 피해자들의 삶을 통해 드러내고, 이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일본은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자기네 침략전쟁에 식민지 민중의 신체와 노동력을 무제한 ‘사용’하겠다고 공포한다. 식민지 조선인의 처지에서 보면, 내선일체를 내세워 ‘황국 신민’이 되라고 했던 일제의 명령은 ‘권리 없는 의무’만을 강요당한 것이다.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일본은 ‘전시체제’를 구축했다. 그 전시체제기에, 그러니까 1938∼45년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일본 당국의 통계로 연인원 800만 명이 넘는다. 전수조사를 한 것이 아니었기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수는 실체적으로는 ‘의문부호’에 싸여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시기 일본과 사할린, 남양군도, 만주, 동남아시아로 동원된 조선인은 150만 명, 한반도 안에서 노역에 동원된 수는 650만 명이다. 두세 번씩 동원된 사람들을 고려해 연인원 800만여 명을 환산해보면 300만 명으로 추산된다. 3만~4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일본군 위안부는 빠진 수치다.

 

전쟁 책임 뒤집어쓴 ‘조선인들’

 

이 책은 10년 넘게 줄곧 일제 치하 ‘강제동원’ 문제를 붙잡고 씨름해온 역사학자 정혜경(50)씨가 썼다. 그는 현재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는데, 2004년 말 이후 5년 동안 실태 조사와 문서 수집은 물론 피해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녹취했다. 이 책은 그 소산이다.

조선인들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물자처럼 공출’당했다. 전쟁의 시궁창 속에서 뒤치다꺼리를 강요당하다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은 패색이 짙어지자 위안부와 포로감시원 등 조선인들을 총알받이로 몰아세우고는 자신들은 전장을 빠져나가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 정부는 자국민을 제 나라로 귀국시켰지만, 강제로 동원한 300만여 명의 조선인들에 대해선 무책임과 부인으로 일관했다.

책은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흔적을 좇는다. 그 흔적엔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육성과 눈물이 담겨 있다. 일본 땅을 비롯해 동토의 땅 사할린과 항일운동의 터전 간도, 동남아시아, 저 먼 태평양의 남양군도에 이르기까지다.

그중엔 일본의 전쟁 책임을 ‘대신’ 뒤집어쓴 이들도 있다. ‘포로감시원’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에 대해 전후 일본 당국은 책임을 회피했다. 명령을 내린 일본군 장교는 조선인에게 책임을 떠넘겼고, 도쿄전범재판에서 조선인 포로감시원 20명이 사형당했다. 타이와 버마를 잇는 철도인 태면철도(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나오는 철도) 공사에 투입된 조선인 포로감시원 800명 중 살아서 귀국선을 탄 사람은 300명뿐이었다.

사할린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전후 소련과 일본이 벌인 (일본인) 귀국 협상에서 배제됐다.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희생과 눈물이 세상에 알려진 데는 운 좋게 일본 귀환자에 포함된 박노학의 평생을 바친 노력이 컸다. 그는 일본에 귀환하자마자 사할린 동포들의 귀국 운동을 시작했다. 1966년 5800명의 귀환 희망자 명부를 한·일 양국 정부에 제출했고, 사할린 동포와 한국 가족 간에 편지 배달부 구실을 했다.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한 원혼

 

저자는 일본의 침략전쟁이 군부와 일부 우익이 결탁한 전쟁일 뿐 일왕과는 무관하다는 일각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한다. “당시 일본 헌법에 따르면 일본군 총수는 ‘천황’이다. 일왕이 일본군의 모든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히로히토 일왕은 상징적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1942년부터 도조 수상이 건의한 항복을 거부한 주인공”이자 “태평양전쟁이 난 이후부터 대본영에서 직접 전쟁을 지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일본 당국은 패전 뒤 ‘성스러운 결단’으로 전쟁을 종식시켰다고 칭송하며 그에게 평화주의자의 옷을 입혔고, 히로히토는 천수를 누렸다.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수백만 강제동원 피해자의 원혼은 어찌할 것인가”라고 이 책은 묻는다.
* 정혜경 지음, 서해문집 펴냄, 1만3900원
* 허미경 기자 한겨레 문화부문
*...[책 속의 책] 구본준 한겨레 문화부문 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 15선 | copyright The Hankyoreh

 

 

 

스티븐 호킹의 <위대한 설계>
지난해 7월~올해 상반기에 나온 꼭 챙겨봐야 할 책들

 

우주 창조에 신의 손은 없었다

 

 <위대한 설계>는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2010년 최신작이다. 동료 물리학자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의 도움을 받아 쓴 이 책은 호킹의 출세작 <시간의 역사>(1988)처럼 난해한 물리학 세계를 가능한 한 쉽게 풀어쓴 최신 우주론 안내서다.

 

인류 탄생은 중첩된 기적의 소산

 

요컨대, 이 책은 물리학의 언어로 쓴 철학책이다. 호킹은 책의 서두에서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있을까? 왜 우리가 있을까? 왜 다른 법칙들이 아니라 이 특정한 법칙들이 있을까?”라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우주를 가장 깊은 수준에서 이해하려면 우주의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라는 질문뿐만 아니라 ‘왜’라는 질문에도 대답할 필요가 있다. …이 (세) 질문이야말로 생명, 우주, 만물에 관한 궁극의 질문이다.”

아인슈타인 이래로 물리학의 꿈은 만물을 하나로 꿰어 설명하는 ‘통일이론’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통일이론이란 이 우주의 네 가지 기본적 힘인 중력·전자기력·약력(약한 핵력)·강력(강한 핵력)을 단일한 법칙으로 통합하는 이론이다. 이 ‘만물의 이론’은 ‘물리학의 성배’로도 불리는데, 호킹은 ‘모든 것을 통일하는 단 하나의 법칙’이라는 성배를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대신에 그가 제안하는 것이 ‘M이론’이다. M이론이란 우주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호킹은 지도에 비유해 설명한다. 메르카토르 지도는 적도 지방은 정확하게 보여주지만 양극으로 갈수록 면적이 커져 실제 모습을 왜곡한다. 이렇게 지구의 모든 지역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지도가 없다면 여러 지역에 맞는 지도들을 엮어 지구 전체의 근사치를 얻을 수 있다. M이론이란 우주적 차원의 이런 근사치들을 근저에서 떠받치는 바탕 이론이다.

호킹은 M이론의 몇 가지 핵심 내용이 우주에 대한 중대한 비밀을 알려준다고 말한다. 그 비밀이란 우주가 여럿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10의 500제곱’ 개란 거대한 수다. 호킹은 우주의 탄생을 끓는 물에서 수증기 방울이 형성되는 것에 비유한다. 수증기 방울이 수없이 생겨났다 사라지듯이, 초기 상태에서 수없이 많은 우주들이 팽창하다가 미시적 규모를 넘어서지 못한 채 다시 수축해 꺼져버리는 것이다. 그런 위험을 극복한 어린 우주는 급속한 팽창 단계인 ‘인플레이션’을 거쳐 거대한 우주로 확대된다. 그렇게 커진 우주 가운데 하나가 우리 우주다.

이 책에서 호킹이 제안하는 흥미로운 주장이 ‘인본원리’다. ‘인간 중심적인 우주 설명 원리’로써 인류 탄생이라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먼저 호킹은 초기 우주 내부의 미세한 불균일성을 말한다. 만약 초기 우주가 균일했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불균일성 때문에 물질들이 뭉쳐 은하와 별을 형성할 수 있었다. 또 유기화합물의 토대인 탄소가 중심인 행성이 형성돼 실제로 유기물이 만들어지려면 100억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탄소는 초신성이 폭발할 때 별 내부에서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 탄소들이 재료가 돼 새로운 별이 만들어지는데 그중 하나가 지구다. 우주의 나이가 100억 년보다 훨씬 더 먹으면 연료를 소진해 유기화합물이 생성될 조건이 성립하지 않게 된다. 유기화합물에서 인류가 태어나려면 우리 우주의 나이와 같은 137억 년 정도가 적당한 셈이다. 인류의 탄생은 이런 수많은 기적적 조건의 중첩 위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주는 무에서 스스로 태어났다”

 

이런 기적에 신의 손이 개입했어야 마땅한 것 같지만, 호킹은 결론에서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우주는 무에서 스스로, 그것도 수없이 많은 우주들 가운데 하나로 태어났다. “자발적 창조야말로 무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는 이유다.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발적 창조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우주의 운행을 시작하기 위해 신에게 호소할 필요가 없다.” 책의 제목인 ‘위대한 설계’란 자연이 스스로 자기를 창조하는 데 쓰인 법칙, 곧 M이론을 가리킨다. “M이론은 가장 일반적인 초대칭 중력 이론이다. 따라서 M이론은 우주에 관한 가장 완전한 이론일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후보다.” 우주가 M이론이 허락하는 법칙 위에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호킹은 말한다.
* 스티븐 호킹 지음, 전대호 옮김, 까치 펴냄, 1만8천원
* 고명섭 기자 한겨레 에디터 부문 서평
*...[책 속의 책] 구본준 한겨레 문화부문 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