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Book./冊.冊.冊

- 책속의 책, 콜랭의 멋진 신세계

 

 

 

 

책 속의 책 속의 책/ 요르크 뮐러 글/ 김라합  옮김/ 비룡소/ 2005
콜랭의 멋진 신세계/ 스테파니 히드릭젠 글/ 최내경 옮김/ 마루벌/ 2003

 

어느 날 한 소년이 책을 선물로 받는다. 조금 뜯겨진 포장지 안에서 자신이 그려진 책을 발견한다.

책 표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끝없이 반사되어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실제 자기 모습이 아닌 것은 책 속에는 토끼가 한 마리 있다.

 소년은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가지고 책을 비쳐 본다.

책 속에 있는 토끼의 정체를 알고 싶은 것이다. 이제 소년은 돋보기로 책 표지를 관찰하고 있다.

목소리(화자)는 소년에게 가장 작은 그림을 돋보기로 찾아 보라고 격려한다. 마

지막 책은 뭔가 달라야 할 것이다. 돋보기로는 어떤 책이 마지막인지 분별할 수 없다.

소년은 빨간 알과 파란 알이 끼워진 안경을 쓴다. 그림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소년은 아예 그림책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끝없이 걸어서 마지막에 도착해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그림책을 그리고 있는 작가와 맞닥뜨린다.

 

아하, 이제 걸음이 빨라지는군.

처음보다 훨씬 빨라.

누군가를 발견해서 그렇지?

이 책 겉표지의 그림에는 없는 사람(실제 작가) 말이야.

넌 그 사람이 화가라고 생각하지?

다음 책으로 이어져야 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까.

"안녕!"

이건 내가 너한테 하는 말이란다. 그 사람이 바로 나거든.

"아저씨가 이 그림책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예요?"

"그래. 난 그림책 화가가 되어서 "책 속의 책 속의 책"이라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단다.

그래서 이 겉표지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점점 빠져 들어서 이제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됐어!

 내가 도와 달라고 외치는 소리 못들었니?

내가 이 그림을 못 끝내면, 그림책을 만들려던 내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말아. 내 말 알겠지?"

 

실제 작가 아저씨는 한 없이 반사되는 거울처럼 계속되는 책 속의 책 속의 책을 그리다가 자신의 무한 반복의 세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란다. 소년은 자신이 아저씨를 돕겠다며 붓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책의 뒷 면에 "한 없이 계속되던 책 속의 책 여기서 끝나다."라고 한 문장을 쓴다. 이 순간에는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작가가 된다. 이제 작가와 소년은 나란히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또는 이발관에서 전방과 후방에 평면 거울이 붙여져 있는 경우가 있다. 거울과 거울 사이에 서면 빛이 서로 반사되어 꼭 같은 영상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약 두 거울이 정확하게 수평을 이룬다면 이론적으로 빛은 무한히 반복될 것이다. 이 책은 이런 무한 반복의 공간을 소재로 다루는 한 편 서사행위 자체를 이야기 속에 담아 내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메타픽션이라고 부른다.

그림책의 소재는 매우 다양하지만 작품을 창조하는 서사행위 자체를 소재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책 역시 그런 유형가운데 하나이다. 본래 일반적인 서사(敍事)의 구조는 실제 작가-->내포작가-->화자-->메시지-->수화자-->내포독자-->실제 독자 라는 대칭 구조를 지니고 있다. 반면 이 작품은 이러한 서사적인 구조의 벽을 허물고 독자가 책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책 속에 있는 인물이 책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또한 책속의 등장인물이 그 자신을 창조하고 있는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가를 데리고 책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책 속에 등장하는 작가는 현실의 작가가 아니며 작가가 내세우는 작가라는 점에서 서사의 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본질적으로 서하는 어떤 화자를 내세우든지, 또한 어떤 구조를 지니든지 일인칭 서술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책과 비슷한 컨셉의 또다른 책으로 스테파니 히드릭젠의 <콜랭의 멋진 신세계>(마루벌)가 있다. 이 책에서는 달팽이가 책장을 뚫고 튕겨져 나간 곳이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실로 묘사된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등장인물들이 피조세계를 벗어나 작가가 잠시 벗어 놓은 안경에 비취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지금 막 칠해 놓은 밑그림 수준까지 가본다는 줄거리이다. 한편 마르야레나 렘브케가 글을 쓰고 지빌레 하인이 삽화를 그려넣은 <책 속의 이야기, 책 밖의 이야기>(국민서관)이라는 책은 전형적인 메타픽션의 유형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서사는 두 차원의 이야기가 교차적으로 전개되는 데 즉 작가가 창조하는 이야기의 세계와 현실 작가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면서 진행된다. 본래 전통적인 서사에서는 이야기와 작가는 엄연히 차원이 다른 존재들로서 상호 교통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지만 메타픽션을 의도적으로 그 경계선을 허물어버린 것이다.

사람은 서사적인 존재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인가 아니면 이야기가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인가? 전통적인 서사이론에서는 작가가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이야기 자신의 플롯대로 살아줄 사람을 찾는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태백산맥>을 쓰신 작가 조정래씨의 작품활동을 다룬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만 나열한 것이 노트 한 권 분량이었는데 가만히 있으면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이 빨리 자신들의 삶을 전개해 달라고 소리치는 것 같아 쉴 수 없었다고 했다. 한 편의 완성도 높은 이야기는 작가가 창조하는 것이지만 그 자체로서 생명력이 있어서 작가를 통해서 태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이야기는 한 번 시작되면 완성을 향해 가고자하는 관성이 있다. 내가 이야기를 만들지만 그 이야기는 다시 나에게 영향을 미치며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서사의 이런 속성을 고려해 볼 때 메타 픽션은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과의 관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서사의 구조이다. 메타 서사의 구조를 가진 책들은 이야기가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설명하는데 효과적인 매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