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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

 

 

 

 

 

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

 

 

 

 

문화, 인간 그리고 삶에 대해 사유하기

 

 

1858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게오르그 짐멜은

191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생전의 활발한 저술활동에도 불구하고 주변인이자 이방인으로 머물렀던 학자였다.

 국내에서도 짐멜은 사회학자 막스 베버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진 편은 아니다.

그의 대표작 『화폐의 철학』이 이미 20여 년 전에 번역되었지만

그 후 국내에서 짐멜에 대한 논의는 그다지 활성화되지 못했다.

독일의 학계에서도 짐멜이 재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그의 전집 출판이 시작되면서 부터였다.

사후에도 그가 오랫동안 조명을 받지 못한 이유는 그의 글쓰기 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화폐의 철학』 같은 대작도 있지만 ‘유행’, ‘장신구’, ‘모험’, ‘식사’ 처럼 짐멜은

일견 사소해 보이는 일상적 현상과 과정을 다루기를 좋아했고 따라서

그의 글은 진지한 학문적 성찰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 단편적이고 비체계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큰 이유는 짐멜의 관심이 사회학, 철학, 미학, 심리학, 예술사, 역사학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학문에서도 짐멜 연구의 책임을 도맡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짐멜의 수용을 더디게 한 이 두 가지 이유가 거꾸로 그에 대한 최근의 활발한 관심을 설명해준다는 사실이다.

학문간 벽을 허무는 통합 학문적 시각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우리 시대에

비로소 다양한 학문적 지평을 넘나드는 짐멜의 사상적 매력이 돋보일 수 있었고,

미시적인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취향은 구체적 현상들을 다루는 짐멜의 글에

주목하게 된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최근에 짐멜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번에 총 10권으로 기획된 짐멜 시리즈 첫 권인 『짐멜의 문화이론』도 이에 부응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 책은 ‘개인’, ‘사회’와 함께 짐멜의 지적세계를 구축하는 세 가지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문화’에 대한 짐멜의 글들을 선별해서 번역한 책이다.

이 책에 실린 총 7편의 글은 문화의 개념, 본질, 변동, 위기에 대한 짐멜의 철학적 성찰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책을 읽다보면 짐멜의 사상이 사회학뿐 아니라 여러 학문에 걸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문화’ 일반에 대한 그의 관심 때문임을 알게 된다. 문화는 어느 특정 분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 창조한 모든 구성물을 다 포괄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과학, 종교, 예술, 윤리, 경제 그리고 기술 같이 인간 삶과 행위를 규정하는 모든 형식이 다 포함된다.

또한 짐멜에게 문화는 인간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객관적 구성물만이 아니라 그러한 객관적 구성물을 매개로

 인간 영혼이 자기 자신의 통일성에 도달하는 길, 즉 ‘문화화’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문화에 대한 짐멜의 철학적 성찰은 ‘주관문화’와 ‘객관문화’ 혹은 ‘인격문화’와 ‘물격문화’의 이분법에서 시작된다.

다소 생경한 이 개념들은 제1장에 수록된 ‘문화의 개념과 비극’이라는 글에서 짐멜이 들고 있는 예를 통해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짐멜은 언어문화에서 어떻게 객관문화와 주관문화의 괴리가 발생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언어적 표현가능성이 독일어나 불어나 모두 100년 전보다 어마어마하게 풍부해졌고 세분화”되었지만

“개별인간의 말하기와 쓰기를 살펴보면, 전체적으로는 더 올바르지 못하고 위엄도 적고 통속적이다”.

 여기서 언어의 객관적 발전 정도가 객관문화 혹은 물격문화

(‘물격’은 사물이 인간과 상관없는 고유한 지위를 누린다는 의미임)에 해당하고,

개인적 차원에서의 언어사용수준은 주관문화 혹은 인격문화에 해당한다.

이는 사상과 관념, 지식의 발전에도 해당한다. 짐멜은 저장된 지식과 그 지식 사용자의 관계를

“마치 뚜껑이 꽉 닫힌 통이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채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아 다니는” 것 같다는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이는 개개인이 지식을 단지 사용할 뿐이지 그것의 의미와 정신적 내용을 자신의 인격에 동화시킬 기회가 없음을 지적한 비유이다.

 여기서 보듯이 언어나 지식을 만든 것은 인간이지만 그러한 구성물들은 자체의 고유한 발전논리를 가지게 되면서

 그 결과 인간의 자기완성을 촉진시키는 방향과는 무관하게 발전하게 된다.

삶에서 단절된 전문성의 문제는, 짐멜의 표현을 빌자면, 객관문화와 주관문화의 모순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순은 문화발전에 내재한 숙명과도 같다고 짐멜은 보고 있다.

현대는 객관문화가 발전할수록 주관문화는 위축되는 역설이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의식된 시대이다.

 제3장에 수록된 ‘인격문화와 물격문화’에서 짐멜은 그 원인을 더욱 고도화된 노동 분업으로 설명한다.

 노동 분업이 발전함에 따라 노동의 산물에 인격의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노동 분업 이외에 짐멜은 현대에 그 리듬이 급격히 빨라진

유행을 객관문화와 주관문화의 괴리가 증폭된 또 다른 원인으로 들고 있다.

현대의 유행은 그 교체 주기가 훨씬 빨라지고 대중적 확산 효과를 가지게 되면서

유행의 내용을 개개인이 인격적으로 동화할 가능성을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현대의 문화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진단에도 불구하고 짐멜의 시각은 반(反) 문화적인 입장들과는 구분된다.

‘문화의 본질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보듯이 짐멜은 종교적 고양이나 윤리적 자기헌신,

에로스적 관계 등에서 문화의 길을 통하지 않고 특별한 인격체가 내적으로 영혼의 고양을 이룰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관심을 갖는 인격완성은 “인간영혼이 스스로 도달한 완성물이 아니라,

인류의 정신적-역사적 노동의 구성물, 즉 문화라는 우회로를 거친 영혼의 완성”이다. 그것이 곧 ‘문화화’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책에는 등장하지 않는 짐멜의 화폐 철학이 생각난다.

짐멜에 따르면 ‘화폐’는 이중적인 문화적 의미를 갖고 있다.

화폐는 비인격화, 탈개성화를 촉진시킨 문화형식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화폐경제가 철두철미 지배하는 대도시야말로 질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개인주의,

즉 ‘질적 개인주의’ - 짐멜은 이 표현을 보편적 인간성에 초점을 맞춘 ‘양적 개인주의’와 구분해서 사용한다

 - 가 실현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에서 개체성과 인격의 발전은

사회적•문화적인 것의 토대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토대 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짐멜의 문화철학적 시각이 잘 드러난다.

짐멜은 자기가 살던 20세기 초의 정신적 상황을 문화와 삶의 대립이라는 구도를 통해 예리하게 통찰했던 철학자였다.

 그가 살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여 년 전이지만 이미 그 시대는 객관문화가 엄청난 속도로 증대하고

문화와 삶의 모순이 한층 심화되면서 문화의 위기의식이 팽배해진 시대라고 짐멜은 진단한다.

그에게 현대는 문화사에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만성적 갈등, 즉 객관문화와 주관문화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낡은 문화에 대한 투쟁이 새로운 형식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형식의 원리 자체에 대한 대립으로 나타나게 된 시대이다. 이 시대에 삶은 형식 자체를 삶에 적대적인 틀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모든 형식의 불충분성을 부르짖는 정신적 경향이 다양한 분야에서 생겨난다.

제5장에 수록된 ‘문화형식의 변동’에서 보듯이 짐멜은 문화에 대한 삶의 이러한 극단적 모순의식과 형식

 적대적 감정을 당대의 예술, 종교, 철학에서 확인하고 있다. 예술사에 나타난 미래주의,

새로운 종교적 감정을 추구하는 초교파적 신비주의, 반(反) 체계를 지향하는 철학은 모두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기보다는

형식원리 자체에 대한 거부를 동인으로 한다. 그러나 문화형식 자체에 대한 거부나 혐오도 결국은 문화사,

즉 문화발전의 변동사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자 그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 나타나는 과도적 현상이라고 짐멜은 해석한다.

짐멜은 그러한 과도기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중심개념이 ‘삶’이라고 보았다.

 짐멜이 자기 시대에서 확인한 형식에 대한 극단적 대립 뒤에는 다름 아닌 삶의 요구가 숨어있다.

젊은이들이 완전히 추상적인 예술을 갈망하는 이유도 결국은 어떠한 예술적인 형식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삶의 에너지의 표출 때문이라고 짐멜은 설명한다. 이로써 짐멜은 모순의 생성과 해결,

그리고 재생성이 일어나는 문화의 전체적 과정 뒤에는 삶의 무한한 생산력이 들어있다는, 이른바 생철학적 문화이론에 도달한다.

그렇다고 이 입장이 어떠한 문화형식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무형식적인 삶으로 돌아갈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짐멜이 생각하는 문화발전은 문화에 내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인 삶의 요구를 통해 그러한 모순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문화형식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수록된

‘문화의 위기’에 나오는 전쟁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짐멜의 서술에서 이러한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짐멜이 살던 시대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객관문화’가 증대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문화의 위기’를 경고하는 철학자 짐멜의 목소리보다는 일상적인 것,

미시적인 것을 분석하는 현상학자 짐멜의 ‘작은 이야기’들이 더 흥미를 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짐멜의 모든 ‘작은 이야기’들에는 문화의 비극, 변동, 모순, 위기에 대한 짐멜의 문화철학적 성찰이 깔려 있다.

 범주의 해체를 이야기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인격의 완성, 영혼, 삶 등의 개념을 고수하는 짐멜의 문화이론이

 약간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문화라는 화두가 유행인

이 시대에 문화와 문화발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따져보라고 독려하는 짐멜의 목소리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귓전에 쟁쟁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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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윤미애 중앙대학교 한독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