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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 골짜기

 

 

 

러시아의 소설가 겸 극작가. 《지루한 이야기》, 《사할린섬》 외 수많은 작품을 써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객관주의 문학론을 주장하였고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대한 올바른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저술활동을 벌였다.
《대초원》, 《갈매기》, 《벚꽃 동산》등 많은 희곡과 소설을 남겼다

 

 

 

러시아 남부의 항도 타간로크에서 출생하였다. 잡화상의 아들로, 조부는 지주에게 돈을 주고 해방된 농노였다.
16세 때 아버지의 파산으로 중학을 고학으로 마쳤다. 당시 러시아에는 다위니즘 ·실증주의 ·유물론 등이 속속 소개되었고
국내에서도 뛰어난 의사가 배출된 시기여서 그는 이에 영향을 받아 1879년에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였는데,
그와 동시에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단편소설을 오락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하였다.

남작(濫作)과 검열과 잡지사(社)의 무리한 요구 등에도 불구하고 1880년대 전반 수년 동안에 《관리의 죽음》(1883) 《카멜레온》(1884)
《하사관 프리시베예프》(85) 《슬픔》(1885) 등과 같은 풍자와 유머와 애수가 담긴 뛰어난 단편을 많이 남겼다.
1884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젊은 체호프의 생활에 전기를 가져오게 한 것은
작가 D.V.그리고로비치가 1886년에 그에게 보낸 편지였다. 재능을 낭비하지 말라는 충고를 담은 편지에 감동한 그는
작가로서의 자각을 새로이 하여 희곡 《이바노프 Ivanov》(1887 초연), 야심적인 중편 소설 《대초원(大草原)》(1888)을 썼다.

언제나 문학 속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담으려고 노력한 그는 이 무렵부터 객관주의 문학론을 주장하고,
재판관이 아니라 사실의 객관적인 증인이 되는 것이 작가의 과제라고 보았다. 니힐리즘에 관한 대화를 다룬 《18등불》(88)이라든지,
톨스토이즘에 젖은 일련의 작품도 이 계열에 속한다. 이 시기는 톨스토이뿐만 아니라, 스토아학파의 철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瞑想錄) Ton eis heauton biblia》을 읽고 영향을 받았으며,
《지루한 이야기 Skuchnaya istoriya》(1889) 이후의 작품에 그 영향의 흔적이 보인다.

1880년대의 그의 창작과 생활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지루한 이야기》는 당시의 울적한 심리상태를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시대적 요구에도 응답한 작품이다. 1870년대에 치열한 반제정(反帝政) 투쟁을 전개한 나로드니키(Narodniki)들은
1880년대의 젊은 세대들에게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확고한 이념을 가지도록 요구하였으나,
작자는 주인공인 노교수(老敎授)로 하여금 “나에게는 사상이나 감정을 통일하는 공통 이념이 없다”고 대답하게 하였던 것이다.

 

 

폐결핵 증세가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890년에는 단신으로 죄수들의 유형지인 극동의 사할린섬으로 갔다.

정신적인 정체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으나, 그보다는 제정 러시아의 감옥제도의 실태를 조사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사할린 여행에서 돌아온 후 집필한 르포르타주 《사할린섬 Ostrov Sakhalin》(1895)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유형지에서》(1892)와 《6호실 Palata No.6》(1892)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 후에는 톨스토이즘이나

스토아철학의 영향에 의한 금욕적이고도 자폐증적(自閉症的)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연을 인정하기 위한 인간성 해방에 눈을 돌렸다.

사할린 여행으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1892년에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50마일쯤 떨어진 멜리호보라는 마을로 주거를 옮겨 창작을 계속함으로써 원숙기를 맞이하였다. 1899년에 결핵 요양을 위하여 크림반도의 얄타 교외로 옮겨갈 때까지 소설 《결투 Duel’》(1892) 《흑의의 사제 Chorny monakh》(1894) 《귀여운 여인 Dushechka》(1899) 《개를 데리고 있는 부인 Dama s sobachkoy》(1899) 《골짜기에서 V ovrage》(1899) 등과 희곡 《갈매기 Chaika》(1896 발표, 1898 초연) 《바냐 아저씨 Dyadya Vanya》(1897 발표, 1899 초연) 등을 집필하였다. 이 작품들은 1890년대에 새로운 조류(潮流)를 형성한 상징주의 ·마르크스주의 ·나로드니키와 작자 체호프와의 논쟁적 관계가 반영되었다. 멜리호보 시절에 그는 농민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기도 하고 기근(饑饉)과 콜레라에 대한 대책을 세우며, 학교 건립 ·교량 및 도로 건설 등의 사회 사업에도 힘썼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자기 생업(生業)을 당시에 유행하던 자선적인 ‘조그마한 사업’과는 분명히 구별하였으며, 이 점은 《다락방이 있는 집 Dom s mezoninom》(1896)에서 자유주의적인 자선사업을 비판하는 것을 보아도 분명하다.

그의 4대 희곡의 하나인 《갈매기》가 상연되었을 때 전례를 볼 수 없을 만큼 혹평을 받았으나, 항시 새로운 실험을 시도해 온 그는 그 아픔을 딛고 서서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양해 아래 선구적인 근대 연극의 무대화에 성공하였다. 주제와 줄거리의 생략이라든지 무대에서의 사건의 후퇴, 사소한 일상사(日常事)의 재현에 의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인생의 진실과 미(美)를 시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린 희곡으로서 이 밖에 《세 자매 Tri sestry》(1901 초연)와 《벚꽃 동산 Vishnyovy sad》(1904 초연)을 완성하였다.

M.고리키가 당국에 의하여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박탈당하였을 때 그는 V.G.코롤렌코와 함께 당국의 처사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반납하였다. 이처럼 혁명 전야에 그 정세를 정확히 판단하였던 그는 앞에서 든 만년의 희곡과 소설로써 새로운 시대의 숨결을 올바로 전달하였고, 또 동시에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한 인간의 눈으로 인생의 깊은 기조를 꿰뚫어 보았다. 예술극장의 여배우 올리가 크니페르와 1901년 결혼하고, 3년 후 독일의 요양지 바덴바덴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이 널리 애독되는 것은 그의 작품이 속악(俗惡)과 허위를 싫어하고 인간과 근로(勤勞)에 대한 애정을 북돋우어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독자의 가슴속에 심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안톤 체홉 -  골짜기 (In the Ravlne)1.

1
우클레예보 마을은 골짜기에 묻혀 있어서 큰길이나 정거장 쪽에서 보면
겨우 종루와 면직물 염색공장의 굴뚝이  보일 뿐이었다.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이 이 마을에 대해서 어떤 마을이냐고 묻기라도 하면,
이 고장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 마을은요, 장례식 때 교회 집사가 캐비어를 몽땅 먹어치운 바로 그 마을입니다."

언제든가, 공장주인 코스추코프네 집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그때 늙은 교회 집사가 자쿠스카(러시아 스낵의 일종: 역주)속에
굵은 캐비어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정신없이 먹어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쿡쿡 찌르기도 하고
소매를 잡아당기기도 하면서 눈치를 주었지만
그는 맛에 취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무슨 짓을 당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먹어대고만 있었다.
결국 그는 항아리 속에 들어 잇던 4파운드의 캐비어를 깨끗이 먹치웠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지도 이미 몇 년이 지나고
당시의 교회 집사도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 캐비어 이야기만은 아직도 잊혀지지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마을의 생활이 그 정도로 삭막했던가,
아니면 마을 사람들에게는 10년 전에 일어난
이 하잘 것 없는 사건 이외에는 기억할 만한 재주가 없었던가.
하여간에 우클레에보 마을에 대하여는 달리 이야기할 거리가 없었다.

이 마을에는 열병이 그치지 않고 돌았으며, 여름철에도 곳곳이 진창투성이였다.
늙은 갯버들이 가지를 드리워서 폭 넓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울타리 밑 같은 데는 더욱 질척질척했다.
공장에서 나온는  쓰레기와 면직물 염색에 쓰이는
초산 냄새가 항상 주위에서 풍겨나오고 있었다.
공장은 면직물  염색공장이 셋, 그리고 피혁공장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것이나 마을 한가운데가 아니라
마을에서 약간 벗어난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모두 작은 공장들로 직공의 수는 전부 합해 겨우 4백명 정도 밖에 안되었다.
피혁공장 때문에 개울물은 늘 악취를 풍겼고,
쓰레기는 목초 지대를 오명시켜 농가의 가축들을 탄저병에 걸리게 했다.
그래서 이들 공장에는 폐쇄령이 내려졌으나,
실제로는 지서장과 군의의 묵인하에 모래 조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공장주는 매월 10루블씩 그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있었다.

마을 전체를 통하여 양철로 지붕을 이은 석조 건물은 겨우 두 채뿐이었다.
한 채는 군청이었고, 다른 한 채는 교회 맞은편에 있는 2층 건물로
에피판 출신의 그리고리 페트로비치 치부킨이라는 상인의 집이었다.
그리고리는 식품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 뒤로는 보드카, 가축, 피혁, 곡물, 돼지,
그밖에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다 취급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수출용 부인모에 장식으로 다는 까치 깃털 주무을 맡아
한 쌍에 30코페이카씩 벌기도 하고,
삼림을 사서 목재를 베어내어 팔기도 하고, 고리 대금에까지도 손을 댔다.
어쨌든 빈틈없는 영감이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장남 아니심은 경찰서 수사과에 근무하고 있어서
집에는 어쩌다 한 번씩밖에 들르지 않았다.
차남 스테판은 그를 도와서 가게 일을 보고 있었는데,
신병이 있는 데다가 귀까지 멀어서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스테판의 처 악시냐는 몸매가 날씬한 미인으로,
명절 때가 되면 모자를 쓰고 양산을 바치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여자였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에는 늦게 잤다.
스커트 자락을 살짝 치켜들고 열쇠를 짤랑거리면서,
하루종일 창고에서 지하실로 지하실에서 가게로 뛰어다녔다.
그리고리 노인은 그런 며느리를 볼 때마다 흐뭇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녀가 장남의 아내가 아니라
여자의 아름다움 같은 것은 통 모르는
둘째의 아내라는 것을 애석하게 생가하는 것이었다.
 
노인은 원래 가정적인 사람이어서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자기의 가족을 사람했다.
가족 중에서도 각별히 사랑한 것은 형사 노릇을 하는 장남과 둘째 아들의 처였다.
악시냐는 귀머거리 둘째 아들에게 시집온 그날부터 놀라운 장가 수완을 발휘해서,
어느 손님에게는 외상으로 팔아도 되고
어느 손님에게는 안 된다는 것까지 환히 알고 있었으며,
온 집안의  열쇠를 맡아가지고 남편에게조차 건네주지 않았다.
주판알을 튕기면서 계산을 맞추는 것을 보면
농부가 말의 이빨을 들여다보듯 아주 정확했다.
하루종일 그녀의 웃음소리와 외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노인은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거지 하나하나가
다 신통해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대단한 며느리야! 그래그래, 예쁜 아가..."
 
그리고리는 홀아비였다.
그러나 아들이 결혼식을 치르고 나서 1년쯤 지나자
더 참을 수가 없어서 자기도 재혼을 하였다.
그른 우클레예보에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마을에 살고 있는
바로바라 니콜라예브나라는 쳐녀를 중매를 통해 아내로 맞아들였다.
나이는 꽤 들었으나 가문이 좋고, 상당한 미인으로 몸매도 고왔다.
그녀가 2층에 기거하게 되자,
온 집안이 마치 창유리를 몽땅 갈아 끼운 것같이 갑자기 훤히 밝아졌다.
성상 앞에는 등불이 켜지고, 테이블에는 눈같이 흰 테이블 보가 쓰워졌으며,
창가와 뜰에는 빨간 봉오리를 맺은 꽃들이 놓였다.

식사 때에도 쭉 해오던 대로 한 그릇에 담아놓고
모두들 다같이 떠먹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앞에 한 개씩, 각자  자기 몫의 접시가 나왔다.
바르바라가 즐거운 듯 상냥하게 웃으면
온 집안이 그녀와 함께  미소짓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것도 예전에는 일찍이 없었던 일로,
거지나 순례자나 집시 차림의 여자들이 안뜰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우클레에보 여자들의 노래하는 듯한 애수 띤 목소리나,
술주정으로 공장에서 쫓겨난 초라하고
염치없는 사내들의 조심스러운 기침소리도 창가에서 들려왔다.
바르바라는 처음에는 그들에게 돈과  빵과 헌옷 같은 것을 집어 주더니,
이 집 살림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가게의 물건까지 들어내게 되었다.
어느 날 귀머거리 스테판은
그녀가 차를 4분의 1파운드나 가게에서 집어내는 것을 보고 기가 콱 막혔다.


골짜기 (In the Ravlne) 2.

어느 날 귀머거리 스테판은
그녀가 차를 4분의 1파운드나 가게에서 집어내는 것을 보고 기가 콱 막혔다.
  "어머니가요, 차를 4분의 1파운드나 가게에서 가져갔는데요..." 
그는 나중에 아버지한테 고자질했다.
" 어느 장부에다 적어놓을까요?" 
노인은 한 마디 대꾸도 없이 눈썹을 씰룩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2층에 있는 아내의 방으로 올라갔다.
  "여보, 바르바르슈카(바르바라의 애칭),
가게 물건 중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뭐든지 가져다 써요, 얼마든지 써도 괜찮아."

이튿날, 귀머거리 스테판은 안뜰을 뛰어가면서 그녀에게 외쳤다.
  "어머니, 뭐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가세요!"
  그녀의 자선행위 속에는 마치 등불이나 빨간 꽃에서 느껴지는 것 같은,
뭔가 새롭고 상쾌하고 밝은 마음이 배어 있었다.

금육일의 전날이나. 사흘 동안 계속되는 수호 성자의 기념일 같은 때
이 가게에서는, 도저히 통 옆에서 있을 수도 없을 만큼
냄새가 지독한 소금에 절인 고기를 농부들에게 팔아먹었다.
주정뱅이들에게 큰 낫이나 모자나 프라토크
( 러시아 여자들이 머리에 쓰는 두건처럼 생긴 스카프: 역주)
같은 것을 담보로 잡고 외상 거래도 했다.
질이 나쁜 보드카에 곯아떨어진 공장 직공들은 진흙탕 속에서 뒹굴었다.

이렇게 해서 겹겹으로 죄업이 쌓여 주위에 안개가 낀 것처럼
자욱한 느낌이 들 때라도, 문득 그런 소금에절인 고기나
보드카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성품이 온화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여자가
이 집의 안방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누구나  마음이 가벼워지고 안심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의 자선은 이 괴롭고 암담한 나날 속에서 기계의 안전판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리의 집에서는 이것저것 항상 바빴다.
악시냐는 해도 뜨기전에 일어나 문간방에서 킁킁 콧소리를 내며 세수를 했고,
부엌에서는 어쩐지 불길한 소리를 내며 사모바르에서 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용모가 깨끗한 그리고리 노인은 기다란 검은 프록 코트를 입고
면직물 바지에 번쩍번쩍 빛나는 긴 장화를 신은 채,
유명한 가극 속에 나오는 시아버지같이 뚜벅뚜벅 구두 소리를 내면서 이 방 저 방 거닐었다.

이윽고 가게의 덧문이 열렸다.
날이 샐 무렵 경주용의 사륜 마차가 현관의 출입구에 도착하면,
노인은 커다랗고 차양이 없는 모자를 귀 언저리까지 눌러 쓰고
젊은 사람처럼 날쌔게 마차에 올라탔다.
이럴 때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가 쉰여섯 살 된 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아내와 며느리가 그를  배웅해주었다.
이처럼 산뜻한 프록  코트를 입고,
3백 루블짜리의 크고 검은 종마가 끄는 마차에 올라 앉으면,
노인은 여러 가지 청탁이나 하소연을 하러 오는 농부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원래 그는 농부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어떤 농부가 문 앞에 서서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기라고 하면 화를 내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왜 그런 데 멀거니 서 있는 거야? 저리 가!"
  또 거지라도 서 있으면 이렇게 소리쳤다.
  "하느님한테나 받으러 가게!"
 
그가 장사일로 나가고 나면, 그의 아내는 검정 옷에 검정 앞치마를 두르고
방을 치우기도 하고 부엌일을 거들기도 했다.
악시냐는 가게를 보았다.
병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돈이 짤랑거리는 소리에 섞여
악시냐의 웃음소리와 외침소리가 안뜰에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어보면, 가게에서는 이미  보드카의 밀매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귀머거리 스테판 역시 가게에 나가 있는 것이 예사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한길을 서성거리며,
멍하니 그 근처의 농가를 바라보기도 하고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이 집에서는 하루에 여섯 번쯤 차를 마셨고,
네 번쯤 뭔가를 먹기 위해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그리고 밤이 되면 매상을 계산하여  장부에 기입하고 나서야 깊이 잠이 드는 것이었다.

우클레예보에서는 면직물 공장 세군데와 그 공장의 소유주들,
즉 플뤼민 형제의 집과 쿠스추코프네 집에 전화기 가설되어 있었다.
그리고 군청에도 전화가 있었지만, 그 전화는 가설된 뒤 곧 불통이 되어버렸다.
전화기 속에 빈대와 바퀴가 번식했기 때문이다.
군수는 무식한 사나이로, 서류를 작성하는 데에도 단어 하나하나를 그리는 형편이었다.
전화가 불통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이제부터 전화가 불통이니까 우리들도 여러 가지로 불편해지겠는데." 

플뤼민 형제간에는 송사가 그칠 새가 없었다.
재판을 시작하면 화해가 성립되기까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조업을 중단하는 것이었다.
우클레에보 사람들에게는 이 재판이 일종의 기분전환 거리가 되어주었다.
왜냐하면,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여러 가지 이야기와  뒷소문이 온 마을에 퍼졌기 때문이다.
축제일이면 쿠스추코프네와 플뤼민네는 서로 경쟁하듯 마차를 타고 멀리 돌아다녔다.
그들은 온 우클레예보를 달려다니며 송아지를 치어 죽이기도 했다.
악시냐는 화장을 하고 풀을 잔뜩 먹인 스커트 자락을 와삭와삭 소리내면서
가게  주위의 한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면 플뤼민 아우네 집 사람이 마차를 몰고 나타나
마치 우격다짐하듯 그녀를 끌고 어디론지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런 때면 그리고리 노인도 자기 말을 자랑하려고 마차를 타고 외출했다.
언제나 바르바라가 동행했다.

마차 멀리 타기 경쟁도 끝나고 날이 저물어 사람들이 슬슬  잠자리에 들 시간이면,
플뤼민 아우네 집 안뜰에서는 누군가 값비싼 아코디언을 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달밤 같은 때에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가슴이 울렁거려서,
어쩐지 마음이 들뜨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이 우클레예보도 초라한 골짜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골짜기 (In the Ravlne) 3

장남 아니심은 축제 때 말고는 집에 들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대신 그 고장 사람 편에 곧잘 선물이나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는 언제나 누구 다른 사람이 달필로 대필한 것이었는데,
반드시 편지지 한 장에 청원서와 같은 격식으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아니심이 평소 이야기할 때에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 이상한 말투로 쓰여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두 분께서 즐겨 드시라고
새싹으로 만든 고급 차 1파운드를 보내드리나이다.'

편지마다 끝에는 다 닳아빠진 펜으로 찍찍 긁은 것같이
'아니심 그리고리'라고 서명이 되어 있고, 그밑에는 달필로 '대필'이라 쓰여있었다.
이런 편지가 올 때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모여 몇 번씩이고 소리를 내어 내용을 읽었다.
노인은 감동해서 으레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 아이는 집에서 살기가 싫은가봐,
워낙 학문이 있는 사회에서 출세했으니까 말이야.
뭐 좋도록 하라지! 사람은 각각 제 갈 길이 있으니까."

사육제를 앞두고 어느 날, 우박 섞인 큰비가 내린 적이 있었다.
노인과 바르바라는 바깥 형편을 살펴보려고 창가로 갔다가
놀랍게도 아니심이 역에서 썰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아니심은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듯 한 초조한 기색으로 방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그뒤에도 계속 변하지 않았고,
어쩐지 자포자기하는 듯한 데가 있었다.
별로 출발을 서두르는 눈치도 없어서,
혹 근무처에서 목이 잘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바르바라는 그의 귀가를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능청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저었다.

  "어떻게 된 거냐, 아니심?" 그녀가 말했다. 
"스물 여덟살이나 되어 가지고 여지껏 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ㅉㅉㅉ..."
옆방에서는 그녀가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씨로  'ㅉㅉㅉ...' 하는 소리만 들렸다.
그녀는 노인과 악시냐에게 귓속말로 무어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에는 마치 음모라도 꾸미고 있는 것 같은
야릇하면서도 곡절이 있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은 아니심을 장가 보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아, 글쎄!...동생은 벌써 장가를 들었느데..." 바르바라가 말했다.
"형이 되어서 마치 시장에 내다 놓은 수탉처럼 언제까지 이렇게 짝없이 지낼 셈이야,
제발, 색시만 얻으면 뒷일은 다 잘되게 되어 있어.
아니심은 근무처로 나가고 색시는 집에서 집안일을 거들면 되잖아.
아니심 같은 젊은 사람이 혼자 있으면 생활에 절도가 없어서 안돼.
아무래도 우리 큰아들은 세상의 순리를 몽땅 잊어버린 사람 같이 보여.
이거야 원, 정말이지 결혼을 하지 않고 늙어가는 건 죄악이라구." 

그리고리 가의 남자가 장가를 들 때에는
부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얼굴이 예쁜 색시감을 골랐다.
그래서 아니심의 색시감도 예쁜 처녀가 선택되었다.
아니심으로 말하자면,
그는 볼품없이 생겼을 뿐 아니라 주변머리도 전혀 없는 남자였다.
허약하고 병자 같은 체격에 키도 작았고,
두 볼은 공기가 잔뜩 든 것처럼 볼록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눈을 깜박거리지 않아서 눈매만은 날카로웠다.
붉은 턱수염은 거칠게 자라 있었고,
무슨 생각에 잠길 때에는 수염을 이빨로 자근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더욱이 그는 술을 많이 마셨는데 그것이 표정에나 걸음걸이에 역력히 나타났다.

이런 사내인 데도 신부감이 나섰다는 것,
그것도 상당한 미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좋아. 나도 아주 볼 줄 모르는 건 아니니까.
우리 그리고리 가의 남자들은 워낙 풍채가 좋으니까 말이야."
 
시의 변두리에 트루구에보라는 마을이  있었다.
최근 그  마을은 절반이 시로 편입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시로 편입된 쪽의 땅에 작은 집을 짓고 사는 어떤 과부가 있었다.
그 과부에게는 날품팔이를 하며 살아가는 리파라는 나이 찬 딸이 있었다.
리파가  미인이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트루구예보에 소문이 나 있었지만,
집이 너무 가난하여 청혼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장차 어디 나이 많은 늙은이나 상처한 홀아비가
그녀의 가난을 탓하지 않고 색시로 데려가든지,
아니면 구냥 막 돼먹은 사내에게 시집갈 거라고 사라들은 말했다.
바르바라는 중매장이 여자로부너 이 리파의 이야기를 들은 죽시
마차를 타고 트루구예보에 가보았다.

이윽고 격식대로 리파의 이모네 집에서 자쿠스카와 포도주를 차려 놓고 선을 보았다.
리파는 선을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새로 맞춘 장미빛 옷을 입고,
머리에는 불꽃 간은 느낌을 주는 새빨간 리본을  화려가게 매고 있었다.
화사하고 품위있는 얼굴에 날씬하고 가냘픈 몸매의 처녀였는데,
노천에서 노동을 한 탓으로 얼굴은 햇볕에 그을어 있었다.
얼굴에서 슬픈 듯한 수줍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눈매에는 호기심이 섞인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한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그녀는 젓가슴께가 겨우 사람의 눈에 띌 종도로 작은 계집애였다.
그러나 결혼에 지장이 없을 만큼은 나이가 들어 있었다.
정말 상당한 미인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약간 마음에 걸리는 것은,
대장간의 집게처럼 축 늘어진, 사내처럼 턱없이 큰 두 손이었다.

  "지참금이 없다고 하시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바르라라는 리파의 이모에게 말했다.
"우리  둘째 아들 스테판도 가난한 집안에서 색시를 데려다 짝을 지어주었느데.
지금은 아무리 칭찬을 해도 모자랄 정도로 훌륭한 며느리랍니다.
집안일도 그렇고 장사일도 그렇고, 대단한 일꾼이예요." 
리파는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어째든 좋으실 대로 하세요.
저는 여러분들을 믿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학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날품팔이인 그녀의 어머니 플라스커비야는
겁에 질린 나머지 부엌 한 구석에 숨어 있었다.
그녀가 아직 젊었을 적에 어느 상인 집에 마루를 청소해 주러 다녔는데,
어느 날 상인이 무슨 일로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며 그녀를 꾸짖었다.
그때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놀랐었느데,
그후부터 그녀의 마음은 공포에 사로잡혀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공포 때문에 언제나 손발이 떨리고, 볼은 실룩실룩 경련이 일어났다.
그녀는 부엌에 앉아서 손님들이 무슨이야기를 하는지
열심히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이마에 대고  때때로 성상쪽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었다.
얼큰하게 취한 아니심이 부엌으로 난 문을 열고 서슴없이 말했다.
  "어머니, 왜 그런 데에 앉아 계세요?"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우리들이 영 심심하고 지루하군요."

  그러자 플라스코비아는 더욱더 두려워져서
바싹 마른 가슴에 두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어머, 별말씀을... 점말로  너무 과분한 혼담이 되어놔서요."  
맞선을 본 뒤에 곧 결혼식 날이 정해졌다.
결혼날을 잡은 뒤로 아니심은 집에 있을 때면
줄곧 휘파람을 불면서 이 방 저 방으로 돌아다녔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마치
땅 속까지 투시하려는 것처럼 쏘는 듯한 시선으로 마룻바닥을 응시하기도 했다.

골짜기 (In the Ravlne) 4.
부활제가 지나고 곧 그 다음 주가 되면
결혼하기로 정해져 있건만 조금도 기뻐하지를 않았으며,
새색시를 만나고 싶어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무작정 휘파람만 불고 있었다.
그가 장가를 드는 것은 다만 아버지와 계모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또 마을에는 그런 법도, 즉 집안일을 돕기 위하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한다는 법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근무지로 돌아가면서도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대체로 예전에 집에 왔다가 돌아갈 때와는 거동이 달랐다.
어쩐지 매우 자포자기한 듯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
쓸데없는 말을 수없이 지껄이기도 하는 것이었다.

시칼로보 마을에는 플레절런트 종파(13-14세기경 주세 유럽에서 시작된
광신적 종파의 하나로, 이 종파의 신도들은 자신에게 채찍을 가하는 등
가혹한 고행을 일삼음: 역주)를 믿는 자매가 양잠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결혼 의상을 주문받아서
그 가봉을 하러 왔다가 오래도록 차를 마시고는 돌아갔다.
바르바라는 검은 레이스와 유리 구슬 장식이 달린 갈색 옷을 맞추었고,
악시냐는 가슴에 노란 천을 대고 치맛자락에 무늬를 한 초록색 옷을 맞추었다.
두 자매가 옷을 다 만들었을 때,
그리고리 노인은 현찰 대신 자기 가게의 물건으로 옷 값을 지불했다.
자매는 바라지도 않던 양초와 정어리 통조림 꾸러미를
두 손으로 그러안고 실망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을을 나서서 들판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언덕에 앉아서 엉엉 목놓아 울었다.

아니심은 결혼식 사흘 전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온통 새것으로만 치장하고 있었다.
번쩍번쩍한 윤이 나는 고무 덧신을 신고, 넥타이 대신에 구슬 장식이 달린 빨간 끈을 매고,
외투 역시 새로 맞춘 것으로 소매를 꿰지 않고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기도를 올린 다음,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왔다고 인사를 하며
1루블짜리 은화 10개와 50코페이카짜리 은화10개를 드렸다.
그리고 바르바라에게도 같은 액수의 돈을 내놓았고,
악시냐에게는 25코페이키짜리 은화 20개를 주었다.

이 선물의 가장 큰 매력은 은화가 모두 새것이라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었다.
아니심은 근엄하고 교만한 태도를 취하려는 듯,
짐짓 얼굴표정을 딱딱하게 하고 두 볼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었다.
입에서는 술 냄새가 풍겼다.
아마도 기차가 역에 도착할 때마다 식당으로 쫓아갔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그이 태도에는 어쩐지 자포자기한 듯한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이윽고 아니심은 노인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자쿠스카를 들었다.
바르바라는 새은화를 손에얹어 뒤집어 보기도 하고,
이 마을에서 도시로 이사간 사람들의 소식을 묻기도 했다.

  "덕택에 별탈은 없어요. 모두들 무사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니심이 말했다.
"다만 이반 예고로프네 집에 조그만 불행이 있었습니다.
뭐,  소피아 니키포로브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뿐이에요.
폐병이었지요. 포도주도 나왔더군요.
농부들... 결국 이 마을에서 도시로 이사간 사람들인데...
그들도 2루블  반씩 냈어요. 하기야 그들은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요.
농부들이 소스가 곁들여진 요리를 어떻게 먹겠어요."

  "2루블 반이라!" 노인이 말하고는 머리를 저었다.
  "물론이지요. 도시는 이런 시골과는 달라요.
뭘 좀 먹으려고 요리  집에 가도 한 접시 두 접시 주문하는 동안에
친구들이 모여들고, 그래서 술판이 벌어지고...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새벽녘이고, 계산서를 받아보면
한 사람 앞에 3, 4 루블씩 계산이 돌아가는 게 보통이랍니다.
거게에 만약 사모르도프가 자리를 함깨 하게 되면 문제가 달라져요.
그 녀석은 먹은 다음에는 반드시 코냑이 든 커피를 마시고 싶어하는데,
그 코냑이라는 것이 한 잔에 60코페이카 하는 형편이니까요..."

  "흥, 바보 같으니!"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허풍만 치고 있군!"  
"저는 요즈음엔 언재나 사모로도프와 어울려 다닙니다.
사모로도프가 바로, 집으로 보내는 제 편지를 대신 써주는 바로 그 사람이에요.
아주 글씨를 잘 쓰는 친구입니다. 그렇죠. 어머니?" 
아니심은 바르바라를 보며 즐거운 듯이 말했다.
"사모르도프가 어떤 사나이인지 이야기를 해봤자 어머니는 곧이듣지도 않으실 거예요.
우리들은 모두 녀석을 므후탈인라고 부릅니다.
워낙 온몸이 아르메니아 사람들처럼 새까맣거든요.
저는 녀석을 뱃속까지 꿰뚫어볼 수 있으니까
녀석이 하는 짓이라면 뭐든지 손에 잡은 듯 훤해요.
그것을 녀석도 눈치채고 있어서 제 뒤만 쫓아다니며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끊으려 해도 끊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어요.
녀석도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눈치지만,
저와 인연을 끊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
제가 가는 곳이면 녀석도 반드시 따라다니지요.
제 눈은요, 어머니, 일단 이렇다 싶으면 절대로 실수가 없어요.
이를테면요, 헌옷 시장에서 농부가 셔츠를 팔고 있습니다.
그 농부를 한 번 보고는 '잠깐만,  그 셔츠를 장물이지!'라고 합니다.
뒤에 조사해보면 틀림없이 장물이거든요!" 

"어떻게 그런 것을 알아내지?' 바르바라가 물었다.
  "어떻게고 뭐고 없어요. 어쨌든 제 눈은 그렇게 알아보게 되어 있답니다.
무슨 곡절이 있는 셔츠인가 하는 것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저 어쩐지, 이유없이, 머리에 딱 떠올라서 이건 장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그뿐이에요. 그래서 우리 수사과에는 모두들 이렇게 말한답니다.
'하하, 아니심 녀석. 또 사기꾼을 잡으러 갔군'이라구요.
곧 장물을 찾아내러 갔다는 뜻이지요.
이거야 정말... 훔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숨기기는 아주 어렵거든요!
세상은 넓지만, 장물은 숨길 장소가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우리 마을에서는 지난 주, 군트레프네 집에서
숫양 한 마리와 암양 두 마리를 잃어버렸는데..."
바르바라가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찾아줄 사람이 없어서..."
  "그러면 제가 찾아줄까요?  찾는 것이라면 문제없어요"

  결혼식 날이 되었다.
쌀쌀하면서도 마음 들뜨게 하는 화창한 4월의 어느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멍에와  말갈기에 울긋불긋한 리본을 단 쌍두 마차와 3두 마차가,
절렁절렁 방울 소리를 내면서 온 우클레예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찌르레기도 마치 그리고리네 집에 결혼식이 있는 것을 기뻐하는 것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울어댔다.
골짜기 (In the Ravlne) 5
집 안에는 벌써 여러 개의 테이블 위에 가느다란 물고기와 햄,
내장을 빼내고 대신 양념을 넣어 올리브 기름을 사용하여 요리한 새고기와
만든 엄청나게 많은 보드카와 포도주 병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고,
훈제 소시지와 쉬지근한 대하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리 노인은 테이블 둘레를 돌아다니면서 칼을 갈아주고 이었다.
모두들 계속 바르바라를 불러대며 온갖 일들을 부탁했으므로,
바라바라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숨을 할딱이면서 부엌으로 달려가곤 했다.
부엌에서는 리사가 새벽부터 일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한 악시냐가, 삐걱삐걱 소리나는 새 편상화를 신고
드러난 무릎과 가슴패기를 언뜻언뜻 내보이면서
회오리 바람같이 안뜰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위가 온통 와글와글  들끓었고,
욕을 하는 소리도 들리고 무언가를 다짐하는 소리도 계속 들려왔다.

활짝 열어놓은 문 앞에는 길 가던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무슨 경사가 있음을 느끼게 했다.
  "색시를 데리러 간대!"
한동안 방울 소리가 철렁철렁 울려오더니
그 소리도 멀리 마을 밖으로 사라져 갔다.
2시가 지나자, 마을 사람들이 뛰어나갔다.
다시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신부가 도착했던 것이다.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가지가 달린 촛대에 불이 밝혀졌고,
성가대는 그리고리 노인의 희망대로 악보에 따라 노래하고 있었다.
리파는 등불빛과 화려한 의상 때문에 눈이 부셔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성가대의 높은 노랫소리를 듣고 있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난생 초음으로 몸에 댄 코르셋과 편상화가 몸을 잔뜩 죄어,
마치 기절했던 자가 겨우 숨을 돌렸을 때와 같은 얼굴을 하고서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검은 프락 코트를 입고 넥타이 대신 빨간 끈을 맨 아니심은
한 곳을 응시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노랫소리가 한층 높아질 적마다 황급히 성호를 긋는 것이었다.
그는 너무 감동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죽은 어머니와 성찬을 받으러 왔던 곳도 이곳이었고,
다른 소년들과 함께 성가대석에서 노래를 부른 것도 이곳이었다.
그는 이 교회의 구석구석을 성상 하나하나를 낱낱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그는 결혼식을 올리려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법도 때문에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결혼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이 앞을 가려 성상을 볼 수도 없었고, 가슴을 꼭 졸라 매는 것만 같았다.
그는 기도를 하면서, 머지않아 틀림없이 그의 머리 위에 덮쳐올 불행이,
마치 비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고 마을을 비켜 가는 가뭄 때의 비구름처럼
무사히 자기 위를 그냥 지나가 주십사 하고 하느님께 빌었다.
그가 여태까지 지은 죄업은 그 수가 너무 많아 헤아릴 수가 없었고,
더욱이 용서를 빈다든가 도망친다든가
돌이킨다든가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런 것들쁜이었다.
그래도 그는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소리를 내어 흐느껴  울기조차 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가 과음한 탓이라고 생각했고
아무도 그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갑자기 겁이 난 듯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엄마, 밖으로 나가, 빨리!'
  "조용히!" 신부가 소리쳤다.
그들이 교회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뒤에서 졸졸 따라왔다.
가게 주위나 문 앞에나 안뜰에나 창 밑에나 어디고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여자들이 축가를 부르러 왔다.
신랑 신부가 문턱을 막 넘으려 할 때,
악보를 손에 들고 미리 문간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합창대가
일제히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고,
특별히 시내에서 불러온 악대도 반주를 시작했다.

미리 준비했던 돈 산의 샴페인이 길쭉한 술자에 담겨 나왔다.
그때 눈이 덮일 정도로 눈썹이 길고 짙은,
키가 크고 여윈 엘리자로프라는 목수 영감이 신랑신부에게 말했다.
  "아니심과 너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서로 정답게 살아야 한다.
알겠지?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너희를 지켜주실 것이니."

그리고 그는 그리고리 영감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리, 자, 함께 우세. 기쁨의 눈물을 흘리잔 말이야!"
그는 큰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껄걸 웃다가,
이번에는 굵은 저음으로 말을 계속 했다.
"하하하! 이번  며느리도 틀림없이 좋은 며느리라구!
모든 것이 흠잡을 데가 없어.
모든 것이 다 술술 풀려서 막히는 데가 없을 거란 말이야.
말하자면, 기계가 완벽하고 나사못도 제대로 다 있다는 말씀이야." 

그는 예고리예프 군 출신이었는데, 
젊어서부터 우클레예보 마을과 근처의 공장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그만 원래 이 마을 사람이었던 것처럼 이곳에 정착해 버렸던 것이다.
그 옛날, 바로 이 고장에 왔을 때에도 이미 늙은이였고,
게다가 바싹 마른 것도 그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옛날부터 '목발'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40년 이상을 공장에서 기계수리만 한 탓인지, 그는 사람이거나 물건이거나간에
그것이 견고한지 수리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를 우선적으로 따지게 되었다.
테이블에 앉을 때에도 으레 의자가 튼튼한가 어떠한가를 살펴보고 나서 앉았고,
음식 같은 것도 미리 슬쩍 만져보는 것이었다.

샴페인을 마시고 나서 모두들 자리에 앉았다.
손님들은 의자를 움직이기도 하며 서로 지껄였다.
문간방에서는 합창대가 노래를 부르고 악대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한편 안뜰에서는 여자들이 장단에 맞추어 축가를 부르고 있었다.
이런 모든 소리들이 함께 뒤섞여 괴상하고도 엄청나게 큰소리가 되었다.
이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목발'영감은 의자에 앉은 채  좌우로 몸을 비틀면서
옆 사람을 팔꿈치로 집적거리기도 하고,
이야기를 훼방놓기도 하고, 울다가 웃기도 했다.
  "자, 아가, 아가, 아가들아!"
그는 애칭을 사용하여 악시냐와  바르바라을 부르면서 빠른 말투로 중얼거렸다. 
"얘, 악시뉴슈카하고 바르바르슈카야,
우리 모두 평화롭고 사이좋게 살아 보자꾸나. 우리 귀여운 아가들아."
그는 평소에도 술이 약한 편이었으며 지금도 영국산 화주를 마시자,
모두들 두들겨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하고 혀가 꼬부라드는 것이었다.

골짜기 (In the Ravlne) 6.
손님 중에는 성직자도 있었고, 부부 동반해서 온
공장의 사무원과 딴 마을에서 온 상인과 술집 주인도 있었다.
14년 동안이나 함께 근무하면서
그 동안 한 장의 서류에도 서명한 적이 없고,
관청에 온 사람이면 누구 하나 속이거나 모욕을 주지 않고
그냥  돌려보낸 적이 없다는 군수와 서기도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 다 피둥피둥하게 살찌고 혈색이 좋았다.
둘 다 부정과 사기가 몸에 베어 있어서,
얼굴의 피부조차 어쩐지 유달리 흉물스러워 보였다.
사팔뜨기에다 바싹 말라빠진 서기의 아내는
자기 아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데리고 와서,
접시란 접시는 모두 사나운 새처럼 곁눈질하다가 손에 닿는 대로
무엇이든지 접어서 자기 포켓과 아이들의 포켓에 쑤셔 넣었다.

리파는 여기 와서도 교회에서와 똑같은 얼굴로,
마치 화석이 된 것처럼 꼿꼿이 앉아 있었다.
아니심은 첫 대면 이후 지금까지 그녀와 말 한마디 교환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녀의 목소리가 어떤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있으면서도 시
종일관 침묵을 지킨 채 영국산 화주만 마시고 있었다.
취기가 돌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모에게 말을 걸었다.
  "내게는 사모로도프라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요,
대단한 놈이지요. 명예공민(어떤 공적이나 교육 자격에 대해서
귀족이 아닌 사람에게 주는 칭호: 역주)의 자격이 있어서
이야기를 시키면 참 잘하지요.
그런데 이모님, 나는 녀석을 뱃속까지 꿰뚫어 보고 있고,
녀석도 그것을 알고 있어요. 어떠세요,
한 번 사모로도프의 건강을 비는 뜻으로 함께 건배하시지 않겠어요. 네, 이모님!"

바르바라는 몹시 피곤하고 들뜬 모습으로
손님들에게 요리를 권하면서 테이블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호화로운 요리가 푸짐하게 나와 있으니까
아무도 불평하는 이가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만족해 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날이 저물었으나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점점 자기들의 무엇을 먹고 있고
무엇을 마시고 있는지 분간 못하게 되었다.
또한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음악이 때때로 그쳤을 때,
어떤 여자가 이런 말을 외쳐대고 있는 것만 뚜렷하게 들렸다.
  "실컷 남의 피를  빨아먹다니. 천벌받을 놈, 뒈져 버려라!" 

밤이 되자 다같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플뤼민 아우네 집안 사람들은 집에서 술을 가지고 왔다.
그중의 한 사람은 카드리유(4명의 남녀가 서로 마주 보며 추는
프랑스의 사교 댄스. 19세기경 온 유럽에 유행했음: 역주)를 출 때,
양손에 병을 하나씩 들고 입에 술잔을 물고  추었다.
이것을 보고 여러 사람들이 웃었다.
카드리유를 추던 그들은 갑자기  몸을 꾸부린 채 러시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초록색 옷을 입은 악시냐는 어찌나  빨리 추는지,
그 추는 모습이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치맛자락에서는 바람이 쌩쌩 일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스커트 단의 레이스를 밟았다.
그러자 '목발'영감이 이렇게 외쳤다.
  "야아, 스커트의 허리판이 빠져 버렸단다! 애들아"

  악시나는 거의 깜박이지 않는 잿빛의 앳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에선 줄곧 아리따운 미소가 가시지를 않았다.
이 깜박이지 않는 눈과, 가늘고 간 목 위의 작은 머리와
날씬한 몸매는 어쩐지 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노란색의 가슴판이 달린 초록색 옷을 입고 생글생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은, 이른 봄에 어린 호밀밭에서 머리를 쳐들고
통행인들을 엿보는 독사와 어딘가 닮은 데가 있었다.
플뤼민네 집안 사람들과 그녀는 아주 친한 것 같았는데,
그들 가운데 제일 나이 많은 자가
그전부터 그녀와 은말한 사이라는 것은 누구나 훤히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귀머거리  스테판만이 아무것도 모른채,
그녀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마치 권총을 쏘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호드를 까먹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리고리 노인이 일어나 방 한가운데로 나서며,
자기도 러시아 춤을 추겠다는 신호로 손수건을 흔들었다.
그러자 집안에 있던 사람들뿐 아니라
안뜰에 있던 사람들에게서까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몸소 나오셨다! 몸소!"
  그러나 춤을 춘 것은 바르바라였고 노인은 그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양쪽 발을 교대로 하며 구두 뒤축을 울리고 있을 뿐이었는데도,
안뜰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 밀치고 떠밀면서 창가에 매달려 환성을 울렸다.
잠시 동안이긴 하나 그에 대한 모든 불평 불만을  잊고 있었다-
그가 부자라는 것도,  또한 그가 자기들에게 지독하다는 것도.
  "잘하는데, 그리고리!"
사람들 속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힘을  내라! 그정도면 아직 얼마든지 벌어들이겠구나! 하,하!"

  밤이 깊어 1시가 지나서야 이 모든 소동이 조용해졌다.
아니심은 비틀거리며 합창대와 악대들에게 일일이 작별 인사를 하고
그들 모두에게 50코페이카짜리 새 은화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노인은 한 발로 걷는 것처럼 껑충거리면서 손님들을 배웅했다.
그는 한 사람씩 붙잡고 말했다.
  "이 결혼시에 2천 루블이나 들었어."
  손님들이 꾸역꾸역 돌아가느 사이에 누군가 자기의 헌 외투를 벗어놓고
시칼로보 술집 주인이 입고 온 소매없는 고급 외투를 대신 입고 간 사람이 있었다.
아니심이 이 사실을 알고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가만 있어!내가 곧 찾아올게! 훔친 자식을 훤히 알고 있어! 기다려!" 
그는 거리로 달려나가, 어떤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이윽고 그를 붙잡아 팔을 끌고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취한 데다가 화가나서 빨갛게 상기된 채 땀을 흘리면서,
그때 막 리파가 이모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던 방 안으로
그를 밀어넣고 철컥 자물쇠를 잠가버렸다.
 골짜기 (In the Ravlne) 7
그로부터 닷새가 지났다.
아니심은 떠날 채비를 끝내고
바르바라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등이란 등에는 모조리 불이 밝혀져 있고,
주위에서는 향내가 자욱했다.
바르바라는 창가에 앉아서 빨간 털실로 양말을 짜고 있었다.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느데..." 그녀가 말했다.
"아마 답답한 모양이지. 뭐...
우린 부족한 것 없이 마음 편히 잘 살고 있지.
결혼만 해도 그래, 훌륭하고 실수 없이 치렀지.
아버님은 2천 루블이나 들었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지.
뭐, 그 한 마디로 버젓한 상인답게 사는 걸 중명하는 셈이야.
다만 이 집은 어쩐지 답답해. 그야 물론 탐욕스런 짓만 하니까 그럴 거야.
난 아무래도 그게 마음에 걸려 못 견디겠어.
그 악랄함이란 것을 좀 생각해 봐.
말 한 마리를 바꾸는 데나, 뭔가 조그마한 물건 하나를 사들이는 데나,
사람을 고용하는 데에도 다 그렇단 말이야.
밤낮으로 사람들에게 사기만 치고 있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속임수 투성이야.
우리 가게에서 팔고 있는 금육일에 쓰는 기름 같은 것은,
맛이 쓰고 썩어서 다른 가게에서 파는 송진보다 못할 정도야.
도대체 왜 좋은 기름을 못파느냔 말이야."

  "어머니, 사람은 각기 제 갈 길이 있답니다."
  "너는 그렇게 쉽게 말하지만, 사람은 모두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지.
그러니, 정말 네가 한 번 아버지께 말씀드려보는 게 어떨까!"
  "어머니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게 말이야, 나도 말씀을 드리기는 하지.
그렇지만 아버지는 단한 마디, 아니심이 지금 말한 그대로 말씀하실 뿐이야...
'사람은 각기 제 갈 길이 있다.' 하지만
저 세상에 가면, 그야말로 사람은 각기 어떤 길을 걸었는가 
반드시 조사를 받게 돼. 하느님의 심판은 언제나 올바르시니까."
  "설마 그런 것을 누가 조사하겠어요."
아니심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왜냐하면 어머니, 어차피 하느님 같은 건 없으니까요.
조사하다니, 말도 안 됩니다!"
  바르바라는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웃으면서 두 손을 모았다.

그녀가 그의 말에 너무나도 놀라  매우 별난 사람이라도 보는 것처럼
그를 쳐다보았으므로, 그는 당황해 버렸다.
  "그야 하느님은 있을지 모르지만 다만 믿음이 없단 말입니다.
요전 결혼식 때에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암탉이 품고 있는 달걀을 보면 속에서 병아리가 삐약삐약 울고 있을때가 있지요,
꼭 그와 같이, 제 마음 곳에서도 양심이 울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식이 거행되는 동안 내내 하느님은 계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교회에서 나오자마자 그런 생각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하느님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저희들은 아주 꼬마 적부터 그런 것을 배워왔어요.
어머니 젖을 빨고 있을 때부터 배우는 것은 단 한 가지,
사람은 각기 제 갈 길이 있다는 것뿐이었어요.
첫째, 아버님도 하느님을 믿고 있지 않아요.
어머니가 언젠가는 군트레프네에서 양을 도둑 맞았다고 말씀하셨지여...
전 범인을 찾아주었습니다.
그것을 훔친 것은 시칼로보의 어느 농부였어요.
그런데 도둑질은 그놈이 했는데,
그 양의 털가죽은 놀랍게도 우리 아버지한테 있지 않겠어요...
이러고도 믿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아니심은 한쪽 눈을 깜박거리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군수도 하느님을 안 믿어요." 그는 계속했다.
"서기도 그렇습니다. 교회 집사도 그렇구요.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거나 금육일을 지키는 것은
남에게 욕을 먹지 않으려고,
또 어쩌면 정말로 최후의 심판날이 다가오지 않는다고
장담살 수 없기 때문이겠죠.
요즘 항간에서는 뭐 인간이 나약해졌다든가,
또는 양친을 공경하지 않게 되었다든가,
그런 이유로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떠들어대지요,
쓸데없는 짓이에요. 저는요, 어머니,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요, 어머니, 어떤 것이라도 속까지
꿰뚫어보는 사람이니까 환히 알고 있어요.
딴 데서 훔쳐 온 셔츠를 입고 있는 녀석이 있으면,
제게는 곧 그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음식점에 앉아 있다고 합시다.
어머니 같으면, 그저 차를 마시고 있나보다 생각하시겠지요.
그러나 저는 차도 차지만,
그밖에 그자식은 양심이 없는 자식이라는 것을 환히 알아봅니다.
하루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녀봤자
양심 있는 인간 같은 건 하나도 발견할 수 없어요.
이게 다 하느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건 그렇고, 어머니, 전 이만 물러갑니다.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저를 나쁘게 생각지 마세요"
아니심은 바르바라의 다리께까지 몸을 굽혀 인사를 했다.
  "저희들은 만사에 있어서 어머니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어머니한테는 우리 집안 사람 모두가 큰 은혜를 입고 있으니까요.
어머니는 정말 훌륭한 분이십니다.
저는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심은 매우 감동한 태도로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말을 계속했다. 
  "저는 사모르도프 때문에 어떤 사건에 말려들었습니다.
부자가 되느냐 아니면 파멸이냐, 양단간에 하나입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에는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잘 위로해 드리세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 저... 하느님은 자애로우셔.
그보다도 아니심, 노는 아내를 더 귀여워해 줘야 되네.
너희들은 둘 다 입을 꼭 다문 채 눈싸움만 하고 있잖아.
하다 못해 서로 웃는 얼굴이라도 보여주어야지." 
"예, 그런데요, 그 사람은 좀 별나요..."
아니심은 이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언제나 입을 꼭 봉하고  있어요.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린 겁니다. 좀도 어른이 되어야겠어요."

  현관 앞 계단 께에는 벌써 키가 크고 살찐 흰 수말이 마차에 매여서 있었다.
그리고리 노인은 몸의 리듬을 조절해서 달려가
기운차게 마차에 뛰어 올라 고삐를 잡았다.
아니심은 바르바라와 악시냐와 아우에게 키스를 했다.
현관 앞 계단에는 리파도 나와 있었지만,
그녀는 몸도 까딱 않고 서서 마치 배웅하러 나온 게 아니라
그저 우연히 거기 있게 된 것처럼 엉뚱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심은 리파에게 다가가서 볼에다 가볍게 입술을 댔다.
  "잘 있어요."하고 그는 말했다.

골짜기 (In the Ravlne) 8.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어쩐지 애매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다가 이내 얼굴을 떨기 시작했다.
모두들 그녀가 가엾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아니심도 마차에 뛰어올라 허리에 손을 대고 의젓한 태도를 취했다.
자기가 미남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골자기를 빠져나가는 동안
아니심은 계속 마을 쪽을 돌아다 보고 있었다.
맑게 갠  따뜻한 날이었다.
가축들은 이 해 들어 처음으로 들에 나와 있었고,
그 가축들 주위에는 나들이 옷으로 곱게 단장한
처녀들과 부인들이 거닐고 있었다.
들에 나온 것이 기쁜지 누런 황소가 음매음매 울면서
앞발로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위아래 곳곳에서 종다리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심은 아름답게 흰 칠을 한 교회 - 그 교회는 최근에 하얗게 칠을 했다.- 
쪽을 자꾸 돌아다 보고,
닷새 전에 자기가 거기서 하느님께 기도까지 했던 것을 생각해냈다.
그는 또 초록색 지붕의 학교를 바라보거나
그 옛날에 멱을 감고 낚시질하던 작은 시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즐거운 생각이 문득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순간에,땅 위에 갑자기 벽이 솟아올라와
자기가 가는 길을 막고, 자기를 과거 속에서만 사는 인간이 되게 해 준다면
얼마나 졸을까 생각하는 것이었다.
 
정거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식당으로 들어가서 셰리 주를 한 잔씩 마셨다.
노인이 돈을 치르려고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제가 낼께요!" 아니심이 말했다.
  노인은 감동해서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애가 바로 내 아들이오!' 하는 듯이 식당 주인 영감에게 눈짓을 했다.
"아니심, 너는 집에서 장사일을  돌봐주었으면 좋겠다만..." 노인이 말했다.
"넌 워낙 장사 솜씨가 좋으니까!
그러면 내가 너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돈으로 싸줄 텐데."
  "그렇지만 아버지, 아무래도 그건 곤란해요."
  세리 주는 시큼하고 봉랍 냄새가 났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 잔씩 더 마셨다.
  정거장에서 돌아왔을 때,
노인은 처음에 자기 집 새 며느리를 전혀 몰라보았다.
리파는 남편이 집에서 떠나자마자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갑자기 명랑해졌던 것이다.
그녀는 낡은 스커트를 입고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올리고,
맨발로 현관의 계단을 닦으면서
은방울을 굴리는 것 같은 높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걸레를 빤 물통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
그녀가 곧잘 짓는 어린애 같은 웃음을 띠고 태양을 우러러볼 때에는,
그녀 역시 종다리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현관의 계단 앞을 지나가던 늙은 고용인이 머리를 끄덕이며 만족해 했다.
"정말이지, 당신네 며느리들은 하나같이 하느님께서 내려주셨나 봐.
그리고리! 정말 색시들이 모두 보물 덩어리야!"

7월 8일 금요일,
'목발'이란 별명이 붙은 엘리자로프와
리파는 카잔스코예 마을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들은 카잔의 성모를 예배하기 위해 교회 미사에 참례하러 갔던 것이었다.
그들의 훨씬 뒤에서는 리파의 어머니 플라스커비야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몸이 아픈데다 숨이 가빠서 자꾸만 뒤처지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그래!..." '목발' 노인은 리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래서?"
  "저는요, 아저씨, 잼을 무척 좋아해요." 리파가 말했다.
"혼자 방구석에 앉아 잼을 섞어서 차를 마셔요.
그렇지 않으면 시어머니하고 마셔요.
그러면 어머니는 뭔가 뜻 있는 이야기를 해주시지요.
우리집에는 잼이 엄청나게 많이 ... 네 항아리나 있어요. '
자, 먹어요, 리파, 얼마든지'라고 말한다구요.
  "그래? .... 네 항아리씩이나!"
  "굉장한 살림이에요.
휜빵과 함께 차를 마시고 쇠고기도 먹고 싶은 대로 양껏 먹을 수 있어요.
잘 살긴 하지만, 전 어쩐지 무서워요,
아저씨, 무서워서,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뭐가 그렇게 무섭지?" 
목발노인이 묻고는 플라스코비야가 얼마나 뒤처졌나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맨 처음에는요, 결혼식 뒤에 아니심이 무서웠어요.
뭐 야단치거나 하지 않는데도, 그저 그이가 옆에 오기만 하면
전 온몸이 오싹해져서 뼛속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어요.
그래 저는 밤새도록 자지 않고 벌벌 떨면서 하느님께 기도했어요.
그리고 요즈음에는 악시냐가 무서워요,
아저씨. 그 사람도 특별히 어떻게 하는 건 아니예요.
악시냐는 줄곧 웃고 있지만 때때로 창문 쪽을 바라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그 눈매가 얼마나 무서운지,
마치 외양간에 있는 양처럼 초록색으로 번쩍번쩍 빛이 나요,
플뤼민 아우네 사람들은 그분에게 이상한 짓을 권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 시아버지는 부초키노에 40헥타르의 땅이 있지'하고 말하지 않겠어요.
'그곳에는 모래도 있고 물도 있으니까, 악슷시(악시냐의 애칭),
거기에다 당신 돈으로 벽돌공장을 세워요.
우리가 한몫 낄 테니까' 이렇게 말한단 말이에요.
벽돌은 지금 1천 개에 20루블이나 하니까 이익이 많은 사업일테죠,
어제 점심 때도 악시냐가 시아버님께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요.
'저는 부초키노에 벽돌 공장을 세워서 제 사업을 한 번 해보고 싶어요'라구요.
그리고 방글 방글 웃는 거예요.
그러자 시아버님은 싫은 얼굴을 하셨어요.
틀림없이 악시냐의 말이 마음에 안 드신 것예요. '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뿔뿔이 헤어지면 안돼.
모두 함께 살아야지'라고 시아버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그분은 눈을 부릅뜨면서 이를 갈지 않겠어요...
튀김을 내왔는데 먹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말예요, 전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일인데,
그분은 도대체 언제 자는지 몰라요!" 리파는 말을 계속했다.
"그분은 30분쯤 잤나 싶으면 갑자기 발딱 일어나서
그 근방 일대를 돌아다니며 살펴보는 거예요.
농부들이 어디에 불이라도 지르지 않나,
뭘 훔치러 오지나 않나 걱정스러운 거지요.
전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무서워요, 아저씨!
그리고 플뤼민 아우네 집안 사람들은
결혼식이 끝난 다음부터 밤잠도 자지 않고 재판하러 도시로 쏘다니고 있어요.
그게 모두 악시냐 때문이라고 온 마을에 소문이 자자해요.
세 형제 중에서 두 형제는 악시냐에게
공장은 세워주마고 약속했는데. 막내가 성을 냈다나 봐요.
이래저래  공장은 한 달이나 쉬어버렸어요.
그 바람에 우리 프로홀 아저씨는 일자리를 잃고
이 집 저 집으로 빵부스러기를 얻으러 돌아 다니는 형편이예요.
'아저씨, 들일을 나가시든지 산판에라도 가서 일하시면 어때요?
그러고 다니시는 게 수치스럽지 않으세요?'
라고 제가 말씀 드렸어요. 그랬더니 아저씨는
'하지만 리퓌니카, 나는 농사일에서 손을 뗀 지가 오래되어서
이젠 아무 일도 못해!...' 라고 말씀하시지 않겠어요."

두 사람은 싱싱한 당버들숲 앞에 멈추어 한숨을 돌리면서
플라스코비야가 다라오기를 기다렸다.
엘리자로프는 수년 동안 도급을 맡아 목수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말 한 필 장만하지 못해서 언제나
빵과 양파를 담은 작은 자루를 짊어지고 이곳저곳을 걸어서 다녔다.
그는 두 팔을 흔들며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걷기 때문에
함께 나란히 걷기가 매우 힘들었다.
골짜기 (In the Ravlne) 9.
숲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경계표가 하나 서 있었다.
예리자로프는 그것이 든든한가
어떤가 보려고 손으로 만져보았다.
플라스커비야가 숨을 헐떡거리면서 다가왔다.
주름살투성이에 항상 두려운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도 오늘만은 행복하게 빛났다.
오늘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처럼 교회에도 나갔고,
교회에서 오는 길에는 장터에 들러서
배를 넣은 크바스까지 마시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있어서 이런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즐겁고 보람있게 산 듯한 생각이 들었다.

잠시 쉰 다음에 세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해가 막 지려는 참이어서,
그 지는 햇빛이 숲 속에 비껴들어 나뭇가지들을 붉게 물들였다.
수풀 앞쪽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계속 울려왔다.
그들보다 훨씬 앞서서 걸어가고 있던
우클레예보 마을 처녀들이 숲 속에서 쉬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버섯이라도 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야. 이 처녀들아!" 예리자도프가 소리쳤다.
"야, 이쁜이들아!"  곧 이어 웃음소리가 그 말에 응수했다.
  "'목발'이 왔다.'목발'할아범!"
그러자 메아리도 거기 따라서 웃었다.
이윽고 수풀을 지나왔다.
공장의 굴뚝 꼭대기가 보이기 시작하고, 종루의  십자가가 반짝 빛나 보였다. 

거기가 '장례식 때에 교회 집사가 케비어를 몽땅 먹어치운' 바로 그마을이었다.
여기까지 오면 벌써 집에 다 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머지는 다만 이 넓은 골짜기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맨발로 걷고 있던 리파와 플라스코비야는 신발을 신으려고 풀 위에 주저앉았다.
도급 목수도 나란히 앉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갯버들숲과흰 칠을 한 교회와 작은 시내가 있는 우클레예보는
아름답고 평화롭운 마을로 보였다.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돈을 아끼기 위해서
마구 새까만 색으로 칠해놓은, 공장의 지붕  정도였다.
건너편의 바탈진 곳에는 호밀밭이 보였다
- 노적가리로 쌓아 올린 것과 다발로 묶어 놓은 것은
마치 폭풍에 불려 흩어진 것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금방 베어 놓은 것은 가지런히 줄을 지어 누워 있었다.

귀리도 완전히 여물어서 진주조개같이 햇빛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추수는 이제  한창이었다. 오늘은 축제 일이지만,
내일 토요일에는 호밀을 거두어들이고 건초를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다음 날은 또 휴일이다.
매일같이 먼 곳에서 우뢰가 우르릉 우르릉 울렸다.
무더워서 금방이라도 비가 한바탕 쏟아질 것 같았다.
모두들 들판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서든지
시기를 놓치지 않고 추수를 마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즐겁고 들뜬 기분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쩐지 불안한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요새는 보리 베는  인부들 품삯이 비싸지요."
플라스코비야가 말했다.
" 하루 1루블 40코페이카나 한데요!'

  카잔스코에의 장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계속 줄을 이었다.
부인네들, 차양 없는 새 모자를 쓴 직공들, 거지들, 아이들...
짐마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간 다음에
장에서 팔리지 않고 돌아오는 말이 달려왔다.
마치 자기가 팔리지 않은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심술이 난 암소가 뿔을 잡힌 채로 끌려왔다.
그뒤를 또 짐마차가 따랐다.
술취한 농부들이 그 위에 앉아 다리를 흔들거리고 있었다.
어떤 노파가 커다란 모자를 쓰고 긴 장화를 신은
사내아이를 데리고 터덜터덜 걸어왔다.
아이는 더위와 무릎을 급힐 수 없는 무거운 장화 때문에 지쳐 보였는데,
그래도 장난감 나팔을 입에서 떼지 않고 열심히 그것을 불고 있었다.
노파와 아이가 언덕길을 다 내려가서
한길 쪽으로 돌아가 버린 뒤에도 나팔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이곳 공장 주인들은 모두 나쁜 녀석들뿐이어서 말이야..." 
예리자로프가 말했다.
"한심한 일이라구! 요전에도 코스추코프 녀석이
'차양을 다는 데에 송판을 너무 많이 썼어'하고
성을 내고 야단이어서 내가 이렇게 말해주었지.
'천만의 말씀! 필요한 만큼만 썼을 뿐입니다.
코스추코프씨. 그럼 송판으로 죽이라도 끓여 먹은 줄 아시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이러잖아.
'나한테 그따위 소리를 할 수 있어? 멍청이! 얼간이!
주제를 알아야지! 자네를 청부업자로 만들어준 게 바로 나란 말이야!'
이렇게 악을 쓰더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이거, 생색 좀 작작 내시라구요.
청부업자가 되기 전에도 지금처럼 차 한 잔쯤은 마셨단 말이에여'하며 대들었더니
'자네들은 모두 사기꾼들이야'어쩌고 하면서 주둥이를 놀리잖아...
나는 잠자코 있었지만 속으로 '
흥 이 세상에서는 우리들이 사기꾼으로 몰릴지라도,
저 세상에 가보면 바로 너희들이 사기꾼들이야, 하하! 하고 웃어주었지.
그러나 그 이튿날이 되니 녀석이 얌전해져서 말이야,
이따위 소리를 하지 않겠어. '
에리자포르, 내가 그런 소리를 했다고 너무 회내지 말게.
설사 내가 좀 심한 소리를 했다 해도 그건 당연한 거야. 
원래 난 일 상인이고 자네보다는 신분이 위니까 말이야...
그러니 자넨 내게 말대꾸하면 안되는 거야' 어쩌고  하면 말이야.
그래서 나는 '그야 당신은 일등상인이고 나는 목수지요.
그건 틀림없어요. 그러나 말이오. 요셉 성자님도 목수였다고요.
우리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진실한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꼭 위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
코스추고프씨'라고 말해주었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바로 생각해보았어.
일등 상인하고 목수하고 도대체 누가 더 높을까를 말이야.
그러나 물론 목수가 위였지. 그렇지 않다면 이야기가 이상해지지 않겠어.
그렇지, 애들아!" 목발은 잠시 생각해본 뒤에 덧붙였다.
"그렇지 얘들아. 일하는 사람이나 고통을 참는 사람 쪽이 언제나 위에 있는 거야"
골짜기 (In the Ravlne) 10.

해는 이미 저물었고, 작은 시냇물 위에도 교회의 구내에도
공장 주변의 공지에도 짙은 우유빛 안개가 뿌옇게 덮이기 시작했다.
어둠이 왈칵 몰려와서 골짜기에 묻힌 마을에는 등불이 반짝이기 시작했고,
안개 속에는 마치 바닥 모를 심연이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순간적으로,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두려움에 떠는
상냥한 영혼만 제외하고는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남에게 주면서,
평생 이대로 살아가리라 하고 생각하고 있는
리파와 그녀의 어머니에게도 이런 생각 -
이 광대무변하고 신비로운 세계에서 영위되고 있는
수 없는 생활 속에서 자기들도 무언가 의미를 가진 존재라는,
이 세상에는 자기들보다 못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을 스쳐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높은 언덕에 앉아 있는 것이 더없이 유쾌했다.
그들은  행복한 미소를 띠면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옆과 가게 앞에는 밀을 베는 일꾼들이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우클레예보 마을에 사는 농부로서
그리고리네 집에 일하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일꾼들은 다른 마을에서 데려와야만 했다.
그때 저녁 어스름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길고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게는 열려 있었고 구머거리 스테판이
어떤 아이를 상대로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 문 밖에서 보였다.
일꾼들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하면,
큰소리로 전날치 품삯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고리네 집에서는 그날 밤에 돌아가 버리면
다음 날의 일이 곤란해지므로 그들에게 품삯을 지불하지 않았다.
프록의 저고리를 벗고 조끼만 입은 그리고리 노인은
악시냐와 함께 계단 옆의 자작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램프가 밝혀져 있었다.
  "할베요!" 밀 베는 일꾼 하나가 빈정대는 투로 문 밖에서 소리쳤다.
  "절반만이라도 좋으니 품삯을 주이소! 할배요!"
  이어서 곧 와 하는 함성이 들렸으나,
한참 있으니까 또 다시 겨우 들릴 정도의 낮은 소리만 들렸다.
목발은 차를 마시려고 자리에 앉았다.
  "뭐, 그래, 우리들은 장터에 갔다 왔지."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분좋게 놀다 왔지. 아이들도 무척 기분 좋아했지.
이게 모두 하느님 덕택이야. 한데 말이야.
딱 한 가지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
대장간의 사슈카가 담배를 사고는 말이야,
가게 주인한테 50코카이카 은화를 내주지 않았겠나.
그런데 그50코카페이카짜리가 사전이었단 말이야."
목발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낮은 소리로 말한다는 게 마치 목이 졸려 죽어가는 것 같은
쉰 목소리가 되어버렸으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잘 들렸다.
"그 50코페이카짜리가 말이야, 사전이라는 것이 발각된 거야.
모두가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까 말이야,
사슈카 녀석이 말하기를 아니심 그리고리한테 받았다,
요전에 결혼식에 갔을 때 받았다,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래 경찰을 불러서 녀석을 넘겨버린 거야..
그러니 그리고리, 당신도 관련되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 좋아.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할 테니 말이야..."

  "할배요!"아까처럼 빈정대는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왓다
. "할배를 부르잖소!"  모두들 조용해졌다.
  "야아, 얘들아, 얘들아..."
목발이 재빨리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참을 수 없게 졸랐던 것이다.
  "차랑 설탕이랑 고마워요. 이제 슬슬 잘 시간이군.
내 몸은 이미 낡았어. 온몸의 사개가 모두 어긋나버렸으니. 하, 하, 하 !"
  그리고 돌아가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아무래도 나는 이제 슬슬 저 세상으로 떠날 때가 온 것 같아!"
그러고는 갑자기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리 노인은 마시던 차를 그대로 놓고 앉아서 갚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표정으로 보아 집에서 이미 멀리 떨어진 거리를 걷고 있을
목발의 발소리에 귀를 귀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틀림없이 대장간의 사슈카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거예요"
악시냐가 그의 마음 속을 헤아리고 말했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작은 꾸러미를 들고 다시 나왔다.
그가 꾸러미를 펴자 번쩍번쩍 빛나는 1루블짜리 새 은화가 여러 개 나왔다.
그는 그 중의 하나를 집어들어 이빨로 깨물기도 하고 쟁반 위에 굴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을 집어서 굴려보았다. 
  "역시 이 루블 은화도 모두 사전이야..."
그는 악시냐의 얼굴을  보면서 아무리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 이 은화는 그.... 아니심이 그때 가지고 온 선물이야.
얘, 아가, 너 이것을 가지고 가서 말이다..." 
그는 귓속말을 하면 그녀의 손에 은화 꾸러미를 들려주었다.
"이걸 가지고 가서 말이야, 우물 속에 던져버려라...
이런 돈은 보고 싶지도 않아! 조심해서, 이상한 소문이 나지 않게 해야한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주전자도 치우고 등불도 꺼라..." 
리파와 플라스코비야는 창고 안에 앉아서
집 안의 등불이 하나씩 하나씩 꺼져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2층 바르바라의 방에만 파란색과 빨간색의 등불이 켜져 있었고,
그곳만이 무척 평화롭고 여유 있는 청정하나 분위기에 싸여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플라스코비야는 자기 딸이 부잣집으로 시집온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이 집에  오면 매우 황송한 듯한 미소를 띠고
언제나 문간에서 주저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곳으로 차와 설탕 같은 것들을 내오는 것이었다.
리파도 이 집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남편이 도시로 돌아간 뒤부터는 침대에서 자지 않고
부엌이나 창고 같은 데에서 자곤 했다.
골짜기 (In the Ravlne) 11.
그리고 날마다 마룻바닥을 닦거나 빨래를 하면서,
날품팔이 일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지냈다.
오늘도 교회 미사에 참례하고 돌아온 두 사람은
부엌에서 식모와 함께 차를  마신 다음 창고로 가서 
썰매와 벽 사이의 흙바닥에 드러누웠다.
창고 안은 깜깜하고 마구의 냄새가 났다.
집 주위의 등불이 꺼지고,
이윽고 귀머거리 스테판이 가게를 닫는 소리가 들렸다.
밀 베는 일꾼들이 안뜰로 가 각자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드러눕는 기척이 났다.
저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플뤼민 아우네 집에서는
값비싼 아코디언을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라스코비아와 라파는 곧 잠들어버렸다.
두 사람이 무슨 발소리에 잠을 깨고 보니  밖은 이미 밝은 달밤이었다.
창고문 앞에 악사냐가 두 팔에 침구를 안고 서 있었다.
"여기가 서늘할지도 몰라..."그녀는 혼자말을 했다.
그리고 창고 안으로 들어와  달빛을 온몸에 받으면서 문턱 바로옆에 누웠다.
그녀는 잠이 잘 안 오는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
더위를 못이겨 입은 것을 거의 전부 벗어던진 채 괴로운 듯 한숨을 쉬었다.
매혹적인 달빛 속에서 그녀는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자랑스럽고 생동감이 있어 보였는지!
조금 있으니까 또 발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새하얗게 보이는 그리고리 노인이 문 앞에 나타났다.
  "악시냐!" 그가 말했다.
"너 여기 있니?"
  "왜요?" 그녀는 부아가 난 듯이 말했다.
  "아까 너한테 돈을 우물 속에 던져버리라고 일렀는데, 버렸니?" 
"아니, 보물을 우물 속에 버리다니!
그건 밀 베는 일꾼들에게 주었어요..."
"뭐,  뭐라구!" 노인은 기겁을 해서  말했다.
"넌 정말 형편없이 닳아빠진 계집이구나...아아, 이거 큰일을 저질렀구나!"
 
그는 부지중에 손뼉을 딱 지고 나서 그대로 나가버렸다.
걸어가면서도 뭐라고 자꾸만 중얼중얼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악시냐는  일어나 앉아서
부아가 끓어오르는 듯이 휴유 한숨을 쉬었다.
그런 다음 침구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쩌자고 이런 집에 시집 보냈어요!"리파가 말했다.
  "하지만 얘야, 여자는 시집을 가야만 되지 않니.
우리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은 위안받을 길 없는 슬픈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들은 저 높은 하늘에서 별이 빛나고 있는
저 푸른 세계에서 누군가가 하계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우쿨레에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세계에아무리 큰 죄악이 범람하고 있어도, 밤은 역시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세상 역시 이 밤과 같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진리가 여전히 존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달빛이 밤과 융합되듯이,
스스로 정의와 진리에 융합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두 모녀는 다시 편안한 심정이 되어서 서로 몸을 기댄 채 깊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아니심이 사전을 만들어 사용한 죄로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뒤로 몇 달이 지나고 어느새 반년이 넘는 세월이 흘렸다.
기나긴 겨울도 지나고 봄이 돌아왔다.
그 무렵에는 집안 사람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아니심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었다.
밤중에 이 집 옆이나 가게 앞을 지나게 되면
문득 아니심이 감옥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낼 정도였다.
그리고 교회에서 종이 울리면 아무 까닭도 없이 아니심이 감옥 속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는게 고작이었다.

그리고리네 저택에는 그 어떤 그림자가 뒤덮고 있는 듯했다.
집안은 어두워지고, 지붕은 녹이 슬고,
초록색 칠을 한 가게의 육중한 철문은 빛이 바래고-
귀머거리 스테판의  말투를 빌리면,  '바삭바삭해져'버렸다.
그리고리 노인도  어쩐지 어두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머리와 수염에
가위를 대는 일을 그만 두고 자라는 대로 그냥 놓아두고 있었다.
율동적인 동작으로 마차에 뛰어오르거나,
거지에게 '하느님한테 받아라!'하고 호통치는 일도 없어졌다.
모든 일에 근력이 쇠약해진 것이 역력히 드러났다.
이젠 사람들도 예전같이 그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마을의 순경은 그전처럼  뇌물을 받아먹으면서도 가게에 와서는 조서를 작성했다.
노인은 주류밀매 혐의로 조사를 받기 위해서 세 번이나 시내로 소환되었다.
증인이 출두하지 않아서 사건은 미적미적 연기되어 노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노인은 이따금 아들을 면회하러 가기도 한고, 변호사를 사기도 하고,
누구에겐가 탄원서를 내기도 하고, 교회에 성기를 기증하기도 했다.
아니심이 갇혀 있는 교도소의 소장에게는
'영혼은 절도를 안다'라는 금언을
에나멜로 새긴 은제 컵받침에 긴 숟가락을 곁들여 선물했다.
  "내 일처럼 힘써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군요." 라고 바르바라는 말했다.
"저어... 누구든 똑똑한 사람에게 부탁해서,
세도 있는 장관님께 편지라도 내보면 어떨까요...
하다 못해 보석이라도 해 주십사 하고 말예요!
그 아이를 그렇게 고생시키서 어떻게 하나!"
 
그녀는 슬퍼하기 했으나,
그래도 요즈음에는 약간 살이 찌고 피부새도 희어졌다.
그리고 옛날과 다름없이 자기 방에 등불을 켜놓기도 하고,
방 안 구석구석을 청결하게 치우기도 하고,
손님에게 잼과 사과과자를 대접하기도 했다.
귀머거리 스테판과 악시냐는 가게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업-부초키노의 벽돌공장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골짜기 (In the Ravlne) 12.
악시냐는 거의 매일같이 마차를 타고 그곳으로 갔다.
그녀는 몸소 고삐를 쥐고,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호밀밭에서 밖을 엿보는 뱀같이 목을 빼고는
수수께끼 같은 앳된 미소를 던지곤 했다.
리파는 언제나 사순절전에 낳은 아기를 데리고 놀았다.
가엾은 생각이 우러날 만큼 조그맣고 여위어빠진 아기였다.
이 아기가 울기도 하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하고,
하나의 인간으로 취급받아 니키폴이라는
이름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아기는 요람 속에서 자고 있었다.
리파는 문 앞까지 걸어가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니키폴님!"
  그러고는 허둥지둥 아기한테로 달려가서 키스했다.
그리고 또 문 앞으로 가서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니키폴님!"
  그러면 갓난아기는 조그만 빨간 발을 동당거리면서,
목수 에리자로프처럼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묘한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재판날이 결정되었다.
노인은 그 닷새쯤 전에  도시로 떠났다.
그 뒤 증인으로 소환된 농부들이 마을에서 불려 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집에서 고용하고 있던 늙은이도 역시 소환되었다.
 
재판은 목요일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일요일이 자나도 노인은 돌아오지않았고 아무 소식도 없었다.
화요일 저녁 때에 바르바라는 열어놓은 창가에 앉아서
어쩌면 영감님이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옆방에서는 리파가 아기와 놀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아기를 어르며 정신없이 지껄이고 있었다.
  "너는 금방 자랄 거야, 아주 크게 자라구말구!
자라서 넌 농부가 될 거야.
그러면 나랑 날품팔이 가자! 날품팔이 가자, 응!"
  "얘야," 바르바라는 기분이 언짢아 말했다. "
날품팔이를 가다니, 해괴한 소리도 다 하는구나.
바보 같으니라구. 그애는 상인이 될 거라구..."
리파는 조그만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잠시 뒤에는 언제 그런 말을 들었는가 싶게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는 곧 자랄 거야. 아주 크게 자라구말구.
너는 농부가 될 거야. 그러면 나랑 날품팔이 가자, 응!"
  "저런! 또 저런 소리를 하다니!"
  리파는 니키폴을 안고 문 앞에 서서 물었다.
  "어머님, 저는 어째서 이렇게도 애가 귀여울까요?
어째서 이렇게도 가엾지?"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빛났다.
"이 아이는 누구일까요? 어떤 인간일까요?
마치 새털이나 빵부스러기 같이 가볍지만,
저는 이 얘가 진짜 귀여워서 죽겠어요.
이 애는 아직 아무것도 못하고 입도 떼지 못하지만,
저는 이 애가 무엇을 원하는지 눈빛으로 척 알 수 있어요." 

바르바라는 문득 귀를 기울였다.
저녁 기차가 정거장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영감님은 돌아왔을까?
그녀는 이미 리파가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 의미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공포라기보다는 강한 호기심에서 시간 가는 것도 잊고
그저 부들 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농부들을 가득 실은 짐마차가 덜커덩 소리를 내면서 바삐 지나가는 것이었다.
도시로 갔던 증인들이 정거장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마차가 가게 앞을 지나칠 때, 이 집의 늙은 고용인이 뛰어내려서 안뜰로 들어왔다.
그가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묻는 말에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재산과 권리를 박살내구요..." 그는 큰소리로 지껄였다.
"시베리아로 보낸대요. 6년 유형이래요."
가게 뒷문으로 악시냐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석유를 팔고 있었던 모양으로 한쪽 손에 병을 들고
한 쪽 손에는 깔때기를 든 채 입에는 은화 몇 닢을 물고 있었다.
  "아버님은요?" 그녀는 입을 오믈오믈하면서 물었다.
  "정거장에 계십니다."고용인이 대답하였다.
"이제 좀 있으면 어두워지니까, 어두워지면 돌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니심이 유형의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이 온 집안에 퍼졌다.
그러자 부엌에 있던 식모가 마치 초상이나 난 것처럼
목을 놓아 울면서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런 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심님, 독수리처럼 훌륭하신 젊은 서방님.
이제부터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나요,
서방님이 버리고 가신 우리들은 말이에요, 아니심님..."
개들이 깜짝 놀라서 짖어댔다.
바르바라는 창가로 달려가서, 어쩔줄을 몰라하면서
목청껏 소리를 질러 식모를 꾸짖었다.
  "그만 해. 스테파니다.그만 해! 우리를 괴롭히지 마라, 제발!"
모두들 사모바르를 내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라파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아기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노인이 정거장에서 돌아왓을 때,
식구들은 그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귀가 인사를 마치고는 온 집안의 방이란 방은 죄다 돌아다녔다.
저녁도 먹지 않았다.
  "힘써주는 사람이 없었군요..."
바르바라는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누구 높은 살함에게 부탁해야 한다고 제가 말했잖아요...
그때 제 말을 귀담아 듣지 않더니만... 하다 못해 탄원서라도 보냈더라면..." 
"여러 모로 힘썼어!" 노인은 말하면서 한 손을 저었다.
"아니심이 판결을 받은 뒤에 나는 그 애를 변호해준 나으리네 집에 갔었지.
그랬더니 '이제는 어쩔 수 없어요, 늦었어요'라고 말하더군.
아니심 녀석도 역시 '늦었어요'하고 말했어.
그래도 나는 재판소에서 나오는 길로 어느  변호사에게 줄을 대서 손을 써뒀어...
앞으로 일주일후에 다시 나가봐야지. 어떻게 될 지도 모르니까."
노인은 또 다시 입을 다문 채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녔다.
그리고는 바르바라의 방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골짜기 (In the Ravlne) 13.
"아마 내가 무슨 병에 걸린 것 같아.
머리 속이 이렇게 ... 안개가 낀 것 같단 말이야.
도무지 생각을 정리할 수 없으니."
 
그는 리파에게 들리지 않도록 문을 꼭 닫고는
조그만 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 나 말이야, 실은 그 돈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구.
당신도 생각나지? 아니심이 결혼식 전에
새 루블짜리 은화와 50코페이카짜리 은화를 가져온 적이 있었지.
나는 그때 한 꾸러미는 치워두었지만.,
나머지는 내 돈하고 막 섞어버렸지...
이건 옛날 이야긴데,
우리 드리트리 피라티치 숙부님이 아직 살아 계실 때
숙부님은 항상 모스크바나 크림 등지로 물건을 사러 다니셨지.
숙부님한테 아내가 있었는데, 이 아내라는 게
영감님이 물건을 사러 떠나서 집을 비울 때면 딴 사내와 놀아났다구.
아이가 여섯이나 되었지. 그런데  말이야,
숙부님은 한 잔 들어 가기만 하면 으레
'난 도무지 분간이 안 돼,
어느 게 내 자식이고 어느 게 남의 자식인지 말이야."
어쩌고 하면서 웃으셨지. 느긋한 성질이었으니까.
결국 지금의  나도 그때의 그 숙부님처럼 내 돈 주에 어느 게 진짜고
어느 게 가짠지 분간하 수 없게 되었단 말이야.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 가짜로만 보여."
"어머, 당찮은 말씀. 하느님이 살펴주실 거에요!"
  "정거장에서 차표를 사면서 3루블을 치렀는데.
그게 아무거나 가짜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울렁울렁했어. 정말 병인가 봐."
  "그야 그렇겠지만 만사를 하느님께 맡기세요... 저어, 저...."
그녀는 말하면서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이 점만은 염두에 두셔야 해요, 네, 여보...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당신도 이제 나이가 나이니까요,
만일 당신이 돌아가신다면 모두들 저 손자에게 지독한 짓을 할지 몰라요.
모두들 저 니키폴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대할 것이나 생각하면,
나는 걱정이 되어 죽겠어요!
저 애는 아비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고,
어미 역시 나이가 어린데다 우둔하고 보니...
당신은 저거을 위해서, 저 애를 위해 하다 못해 토지라도,
저 부추키노라도 물려주면 어때요,
네, 여보! 정말 착한 앤데, 가없어요!
내일이라도 나가서 서류를 꾸며달라고 하세요. 빠를수록 좋아요."

  "내가 손자 녀석 일을 잊고  있었군.." 그리고리가 말했다.
"잠깐  얼굴을 보고 와야지. 그럼 뭐냐. 그 애는 잘 있단 말이지.
좋아, 좋아, 훌륭히 키워주마. 하느님이 도와 주실 테니까 말이야!"
  그는 문을 열고 손가락을 까딱거려서 리파를 불렀다.
리파는 갓난아기를 안고 곁으로 다가왔다.
  " 리퓌니카, 너 뭐든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래라,
뭐든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어. 우리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을 테니까.
네가 잘 있어주기만 하면 되니까... "
그렇게 말하고 그는 갓난아기를 보면서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내 손자 녀석을 소중히 돌봐줘야 한다.
자식은 없어지고 손자만 남았으니."
눈물이 노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흐느껴 울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이내 그는 깊이 잠들었다.
그때까지 1주일 동안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던 것이다.

노인은 얼마 동안 도시로 나갔다가 돌아왔다.
악시냐는 그가 유언장을 작성하려고 공증인하테 갔었다는 것,
그녀가 벽돌공장을 세우고 있는 저 부초키노가
손자 니키폴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누구한테 선지 들었다.
그녀가 이 말을 들은 것은 아침이었는데.
그때 노인과 바르바라는 바깥 계단 옆의
자작나무 아래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악시냐는 한길과 안뜰로 난 가게문을 닫아 건 다음,
자기가 맡아 가지고 있던 열쇠를 전부 챙겨서
노인의 발 앞에다 철커덕 집어던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당신들을 위해서 일하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큰소리로 외치고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건 뭐, 나는 이 집  며느리가 아니라 하녀나 마찬가지 아녜요?
마을 사람들이 다 비웃고 있어요.
'봐라 그리고리네 집에는 좋은 하녀를 두지 않았냐?'하고  말예요.
나는 이 집에 종살이 하러 온 게 아녜요! 거지도 하녀도  아니예요.
내게는 아버지도 있고 어머니도 있어요."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눈물에 젖은  채,
분하고 원망스런 눈을 치뜨고 노인을 정면에서 노려보았다.
목청껏 악을 써서 얼굴과 목에는 벌겋게 핏대가 올라 있었다.
  "난 이 이상 여기서 혹사당하는 것은 사양하겠다구요!"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제 난 완전히 지쳐버렸어! 악착스럽게 일하고,
하루종일 가게를 지키고, 밤에는 밤대로 보드카를 사러뛰어 다니고...
그런 걸 모두 나한테 시켜놓고서 토지는
저 유형수의 여편네와 그 새끼한테 줘버리다니!
저년은 이 집 안주인이고 마님이고, 나는 그럼 저년의 종이군!
흥 뭐든지 저년에게, 저 유형수의 여편네에게 줘버리라고,
난 우리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나 대신 다른 바보년을 고용하면 되겠지.
이, 인간 같지 않은 것들 같으니!"

노인은 지금까지 한 번도 아이들에게 욕을 하거나  벌을 준 적이 없었다.
또 식구들도 자기한테 폭언을 하거나
무례한 태도를 취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너무 놀라고 기가 질려서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장롱 뒤에 숨어버렸다.
한편 바르바라는 너무 놀라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벌이라도 쫓듯 두 손을 휘휘 내저을 뿐이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짓이야?"
그녀는 공포에 질려서 중얼거렸다.
"애가 왜 이리 악을 쓰나? 그만, 그만... 남이 듣지 않니!
좀 조용히 ... 저런, 좀 조용히 하라니까!"
  "부초키노의 땅을 유형수 여편네에게 줘버리다니..."
악시냐는 계속 악을 썼다.
"이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뭐든지 저년에게 다 주지 그래.
나는 아무 것도 필요없다구, 다들 꺼져버리란 말이야!
당신네들은 모두 한 구멍 속의 너구리들이야!
난 이제 꼴도 보기 싫다구. 이젠 딱 질색이야.
당신네들은 통행인과 여행객들의 돈을 알겨먹지 않았어!
이건 강도나 다를 바 없어.
늙은이건 젊은이건 할 것 없이 모조리 훔쳐먹었잖아...
허가도 없이 보드카를 판 건 누구야? 가짜 돈을 쓴 건 누구야?
궤짝 속에 가짜 돈을 가득 쌓아 놓고서 말이지..
그러고는 이제 와서 나를 내쫓아내려고 한단 말이지!"

열어젖혀 놓은 현관문 주위에 벌써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모두 안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본다고 대순가!" 악시냐는 악을 썼다.
"나는 당신네들을 망신 좀 시켜야겠어!
오래지 않아 부끄러워서 낯을 못 들고 다니게 될 거야!
내 발 앞에 엎드려서 용서를 빌게 될 거야! 이봐요,
스테판!" 그녀는 귀머거리 남편에게 소리쳤다.
"빨리 집으로 갑시다. 나랑 우리 부모님한테로 가요.
이런 죄인들과는 같이 살 수 없으니까요! 자, 채비를 하세요."
골짜기 (In the Ravlne) 14.
안뜰에는 빨랫줄이 있고 거기에 빨래가 널려 있었다.
그녀는 채 마르지도 않은 자기의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줄에서 잡아채어 귀머거리 남편의 팔에 획획 던졌다.
화가 치밀 대로 치민 그녀는 안뜰에 쳐진 빨랫줄마다
뛰어다니면서 옷가지를 한쪽에서부터 잡아채어
자기 것이 아닌 것은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발로 짓밟았다.
  "아아, 저 애를 말려 주세요!' 바르바라는 신음하듯 말했다.
" 도대체 어찌 된 일이야. 저 애에게 부초키노를 줘버리세요.
제발 부탁이니 줘버려요!" 
"야아, 별 여자 다 보겠네!" 문간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저게 여자냐, 저 행패 좀 봐 .... 대단하군!"
 
악시냐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마침 리파 혼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식모는 빨래를 헹구러 냇가로 나가고 없었다.
조리용  난로 옆에 있는 빨래통과 가마솥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오르고 있어서 부엌 안은 자욱한 게 숨이 콱콱 막혔다.
마룻바닥 위에는 아직 빨지 않은 빨랫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니키폴은 굴러 떨어져도 다치지 않도록 그 바로 옆 의자에 뉘어진 채,
조그만 빨간 발을 버둥거리고 있었다.
악시냐가 들어갔을 때.
리파는 마침 악시냐의 속옷을 빨랫감 더미에서 집어내어 통 속에 담고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끓는 물이 든 커다란 바가지로 손을 뻗치려던 참이었다.
  "이리 줘!" 미워 죽겠다는 눈초리로 리파를 노려보면서 
악시냐는 통 속에서 자기의 속옷을 끄집어냈다.
"내 속옷에 손을 대다니, 주제넘은 짓은 그만둬!
너는 유형수의 아내잖아. 조금쯤은 제 주제를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리파는 말도 못할 만큼 놀랐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랐으나, 문득 악시냐가 갓난아기를 보는 눈빛을 깨닫자.
갑자기 그 뜻을 알아차리고 온몸이 저려오는 것이었다.
  "내 땅을 빼앗은 별로 이렇게 해주마!"
이렇게 말하며, 악사냐는 끊는 물이 담긴 바가지를 들어서 니키폴에게 끼얹어버렸다.
이어서 우클레에보 사람들이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무서운 비명이 들렸다.
리파같이 몸집이 자고 가냘픈 여자가
그런 비명을 지를 수 있으리라고는 쉽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안뜰이 온통 조용해졌다.
악시냐는 여느 때와 같은 앳된 미소를 띠고서 말없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귀머거리 스테판은 빨래를 두 팔에 안은 채 안뜰을 서성거리다가
이윽고 말없이 그것을 다시 줄에 느릿느릿 널기 시작했다.
식모가 냇가에서 돌아올 때까지.
부엌으로 들어가서 그안의 형편을 살펴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니키폴은 자치회에서 경영하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그날 저녁 때 쯤 해서 결국 죽고 말았다.
리파는 마차라 데리러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죽은 갓난 아기를 조그만 담요에 싸안고 집으로 향했다. 
최근에 세운, 큰 창문이 나 있는 병원은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건물 전체가 저녁놀에 붉게 물들어서 마치 그 내부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언덕 아래에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리파는 비탈길을 내려와서 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연못가에 앉았다.
어떤 여자가 말에게 물을 먹이려는데. 말은 물 을 먹으려들지 않았다.
"뭐가 더 필요해서 그래?"
여자가 망설이듯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필요해서 그래?"
  빨간 셔츠를 입은 사내아이가 물가에 앉아서 아버지의 장화를 씻고 있었다.
그밖에는 언덕 위에도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먹고 싶지 않은 게로구나..."
리파가 말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윽고 그 여자도 가고 장화를 든 아이도 가버렸다.
주위에는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태양은 잠 자리에 들어가서 붉은 보라빛 비단 잠옷을 입고 있었다.
하늘에서 비껴 흐르고 있는 붉은빛 혹은 보랏빛의 가느다란 구름은
태양이 자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아주 먼데서 알락해오라기가 마치
외양간에 갇힌 암소처럼 애련하고 공허한 소리로 울고 있었다.
이 신비로운 새의 울음소리는 해마다 봄이면 들려왔으나,
그것이 어떤 새이며 어디 살고 잇는지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언덕 위의 병원에서도 연못가의 숲에서도  마을 편에서도 주위의 들판에서도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뻐꾸기는 누구의 나이를 세다가 자꾸만 틀려서 처음부터 다 시 셈을 시작하고 있었다.
연못 속에서는 개구리들이 성난 목소리로 죽어라고 서로 소리지르며 울어대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네놈도 그렇지! 네 놈도 그렇지!'라고 지껄이는 것 같았다.
지독히 시끄러 운 밤이었다.
이들 온갖 생물들은 이 봄밤에 사람 들을,
성난 소리로 울어대는 개구리들까지도,
삶이란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것이니
그 1분 1초라도 아껴서 소중히 여기고 즐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에는 은빛 반달이  빛나고 수많은 별들이 총총이 떠 있었다.
리파는 얼마 나 오래 연못가에 앉아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을 때에는
마을은 이미 잠이 들어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집까지의 거리는 12킬로미터쯤 되었는데,
걸을 힘도 없고 어떻게 걸어갈까 생각해볼 기력조차 없었다.
달은 앞 쪽에서 비추다 점점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아까 울던 그 뻐꾸기가 아주 쉰 소리로, 조롱이라도 하듯이
'저런 힘을 내라니까, 길을 잃는다 구!'하고 외쳤다.
리파는 걸음 을 재촉했다.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 의 머리에서 프라토크가 벗겨져 버리고 없었다.
그녀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자기 아이의 영혼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자기 뒤에서 따라오는 것일까,
아니면 저 높은 별 근처를 날아다니면서
이미 엄마 생 각 따위는 하지도 않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이런 밤에 들판 한가운데서 자기가 노래조차 부를 수 없이 우울할 때
새들의 노랫 소리를 듣거나, 자기가 즐겁지 못할 때 즐거운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아아,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이란 말인가!
이거나 겨울이건, 사람이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그런 것들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혼자서 쓸쓸히 하늘에서 하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달과 단 둘이 있다니,
아아,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이란 말인가...
마음에 슬픔을 안고 혼자 외토리로 떨어져 있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이랴.
이럴 때, 하다 못해 어머니 플라스 코비야라도 함께 있어주었으면!
목발할아버지라도, 식모라도, 농부라도,
아니 그 누구라도 좋으니 함께 있어주었으면!
'부우'하고 알락해오라기가 울었다.
'부우' 갑자기 사람의 말소리가 뚜렷이 들려왔다.
  "짐마차에 말을 매게, 바빌라!"
골짜기 (In the Ravlne) 15.
바로 앞 길가에서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말이 풀을 뜯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두 대의 짐마차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대는 통을 싣고 있었고,
또 한 대의 작은 마차는 무슨 자루를 싣고 있었다.
그리고 두 남자 의 모습도 보였다.
한 사람은 짐마차에 말을 매려고 말을 끌어오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두손을 뒷짐진 채
모닥불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짐마차 옆에서 개가 짖었다.
그러자  말을 끌고 오던 남자가 멈춰 서면서 말했다.
  "누가 이리로 걸어오는 것 같은데."
  "샤알리크, 조용히 해" 또 한 사람이 개에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노인이 목소리였다.

  리파는 멈춰 서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노인이 리파에게로 다가왔다.
  "안녕!"
  "할아버지, 그 개 물지 않아요?"
  "괜찮소. 지나가요, 물지 않을 테니까."
  "저, 병원에서 오는 길입니다."
리파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아기가 병원에서 죽었어요.
지금 이렇게 안고 집으로 가는 길이에요.'
노인은 그 소리를 듣고 속이 좋지 않은 듯,
가까스로 옆으로 비켜서면서 급히 말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새댁. 다 하느님의 뜻이니까.
여보게, 뭘 꾸물거리고 있나!"하고 동행을 보고 소리쳤다
. "빨리 해!"
  "영감님, 말 멍에가 없어요." 젊은이가 말했다.
"아무래도 안 보여요." 
" 이런 멍청이를 보았나!"
  노인은 불이 붙은 숯덩이 하나를 집어들고 후후 불었다.
그의 눈과 코 언저리 가 환히 밝아졌다.
이윽고 멍에를 찾아내자, 불을 들고
리파 옆으로 다가와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동정과 친절의 빛이 나타나 있었다.
  "새댁이 애 엄마요?
어느 엄마든지 모두 자식 때문에 슬픔을 겪게 마련이지."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한숨을 쉬고 머리를 저었다.
바빌라가 불에다 무엇인가를 던져 넣고 짓밟았다.

그러자 갑자기 주위가 캄캄해졌다.
환영은 사라지고, 다시 아까처럼
들판과 별과서로 잠을 방해하는 소란한 새소리만이 남았다.
모닥불 이 타던 그 자리에서 휘눈썹뜸부기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1분쯤 지나자, 다시 짐마차와 노인과
후리후리한 바빌라의 모습이 나타났다.
짐마차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면서 길 위로 나왔다.
  "당신들은 성자님들이세요?" 리파가 노인에게 물었다.
  "아니, 우리는 필사노보 사람이야."
  "아까 할아버지가 저를 보셨을 때,
전 어쩐지 가슴이 확 틔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젊은 분도 마음이 착하실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전 틀림없이 성자님들이라고 생각했어요."
  "먼데까지 가나?"
  "우클레예보까지요."
  "그럼 여기 타요, 크지멘키까지 태워다 줄 테니,
거기서부터 새댁은 똑바로 가면 되고, 우리는 왼쪽으로 돌아서 가고."
바빌라는 통을 실은 마차에 타고, 노인과 리파는 다른 마차에 올랐다.

바빌라가 탄 마차가 앞장 서서 느릿느릿 출발했다.
  "이 애는 하루종일 고통을 겪었어요.:"리파가 말했다.
"조그만 눈으로 저를 쳐 다보면서 아무 말도 안했어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거예요.
아아, 예수님, 마리아님!
저는 슬퍼서 내내 방바닥에 쓰러져 있기만  했어요.
아무리 해도 이 애 머리맡에 서 있을 수가 없었어요. 네, 할아버지,
이렇게 조그만 애가 죽기 전에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나요?
어른들이라면 남녀 불문하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고통을 겪는다지만,
이런 죄 없는 애는 무엇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나요? 네, 왜 그럴까요?"
  "그걸 누가 아나!"  노인은 대답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30분쯤 타고 갔다.
"세상만사  그 이유를 다 알 수야 없지...
왜라든가 어째서라든가 하는 그 이유를 말이야."
노인이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새는 날개가 네 개 아니고 두 개만 붙어 있는데,
이건 두 개만으로도 날 수 있으니까 그런 거지.
마찬가지로 인간도 만사를 전부가 아니고
절반이나 4분의 1정도밖에는 알 수 없게 되어 있는 거야.
그래도 살아가는 데 꼭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은 다들 잘 알고 있지."
"할아버지, 전 역시 걸어가는 게 편하겠어요.
이렇게 타고 있으니 어쩐지 가슴 이 두근두근해서."
"괜찮아 걱정 말아요. 지금 새삼스럽게 내릴 건 없어요."
노인은 하품을 하고 나서 가슴에다 성호를 그었다.

  "걱정 말아요.." 그는 되풀이했다.
"새댁의 슬픔 같은 건 대단치 않아요.
사람의 일생은 기니까...  앞으로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을 거야.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구.
우리를 낳아준 러시아는 무척 큰 나라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며 길 양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 러시아 안에서 안 가본 데가 없이 다 돌아다녔지,
그리고 여러 가지 일도 당해봤지.
그러니 난 거짓말은 안한다구.
새댁.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어.
나는 옛날에 마을에서 공무로 시베리아에 간 적도 있어.
또 아무르에도 갔고, 알타이에도 갔었지.
시베리아에서는 농사를 짓고 살기 도 했었어. 한데 말이야,
그러다가 어머니인 러시아가 그리워져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지.
나는 러시아로 돌아올 때에도 걸어서 왔어.
여윌 대로 여윈 나는 온 몸에 누더기를 걸친 채
맨발로 추위에 떨면서 빵 껍질을 씹고 있었지.
그때 그 나룻배에는 여행을 하고 있던 어떤 나리가 타고 있었는데... 
벌써 돌아가셨다면 부디 하느님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그 나리가 가엾다는 듯이 나를 보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야.
'자네의 빵은 검고, 자네의 세월도  검구나.....'라고 하셨지.
마을에 도착했을 때에는 흔한 말로 빈털터리가 되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지.
옛날에는 여편네도 있었는데. 시베리아에 남아 있다가 그곳 흙이 되어버렸지.
그래서 지금은 날품팔이 농군으로 살고 있지만,
그뒤로 새댁, 나쁜 일도 있었고 좋은 일도 있었다구.
그래선지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안들어.
앞으로도 20년쯤은 더 살 고 싶다고 생각하지.
결국은 좋은 일 쪽이 더 많았다는거야.
어머니인 러시아는 크니까  말이야!"
이렇게 말하며 그는 또 길의 양옆을 둘러보거나 뒤를 돌아보았다.
  
골짜기 (In the Ravlne) 16.
 "할아버지." 리파가 물었다. 
"사람이 죽으면 그 혼백이 며칠쯤이나 이 하계에서 방황하나요?"
  "그런 걸 누가 알겠어!
어디 바빌라에게 물어볼까... 녀석은 학교를 다녔지.
요즈음엔 학교에서 뭐든지 가르치니까. 여봐. 바빌라!" 노인이 말했다.
  "왜요!"
  "바빌라,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며칠이나 이 하계에서 있게 되나?"
바빌라는 잠시 말을 세우고 나더니 대답했다.
  "9일 동안이지요.
우리 카릴라 아저씨가 죽었을 때에는
혼백이 13일 동안이나 집안에서 살았었지요."
  "어떻게 자네는 그걸 알았지?"
  "어떻게라니요, 13일 동안 난로 안에서 똑딱똑딱 소리가 났는데요."
"그래, 좋아 좋아, 자, 가자." 하고 노인은 말했지만
그가 한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크지멘키 근처에서 마차는 큰길 쪽으로 꺾어들었다.
리파는 거기서부터 걸어서 갔다.
벌써 동틀 무렵이었다.
그녀가 골짜기로 내려가니 우클레예보의 집들과 교회는 안개에 싸여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아까 울던 뻐꾸기가 아직도 울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리파가 집에 도착했을 때 가축들은 아직 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모두들 자고 있었다.
그녀는 현관 앞 계단 위에 앉아서 그대로 기다렸다.
맨 처음에 나온 것은 노인이었다.
그는 리파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금방 알아차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말한 마디 없이 입맛만 쩝쩝 다셨다.

  "아아, 리파."그가 말했다.
"너는 내 손자를 끝내 지키지 못했구나..."
이윽고 사람들이 바르바라를 깨웠다.
그녀는 두 손을 깍지끼어 쥐어짜면서 울었다.
그리고 곧바로 죽은 아기의 뒤치다꺼리에 들어갔다. 
  "정말 착한 애였는데..."  그녀가 말했다.
"외동아들을, 이걸 말이야, 끝내 지키지 못하다니, 바보야..."
 
그날은 아침 저녁으로 신공을 올렸다.
장례는 이튿날 거행되었다.
장례식이 끝 난 뒤, 조객들과 성직자들은 마치
오랫동안 굶었던 것처럼 배불리 음식을 먹었다.
리파는 음식 시중을 들었다.
한 신부가 소금에 절인 버섯을 포크에 찔러 높이 쳐들면서 그녀에게 말을 했다.
"아이의 일로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그런 애는 모두 천국에 간답니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 버리자, 리파는 니키폴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비로소 절실히 가슴에 울려와 서 소리내어 울었다.
그녀 는 어느 방으로 가서 울어야 할지 몰랐다.
왜냐하면 아 이가 죽은 마당에 이 집안에는 자기가 설자리가 없다는 것,
자기는 이 집에서 이제 필요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어머, 그런 데서 뭘 짖어대고 있지?" 
악시냐가 문 앞에 얼굴을 내밀고 소리쳤다.
장례식이라는데 새 옷을 입고, 얼굴에는 분을 바르고 있었다.
"뚝 그치지 못 해?"
리파는 울음을 그치려 했지만 암만 해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큰소리로 흐느껴 울었다.
  "내 말 안 들리니?"  악시냐가 소리쳤다.
그리고 성이 나서 발을 탕탕 굴렀다. 
  "누구한데 말하고 있는 줄 알아?
자, 나가, 두 번 다시 여기 오지 마라.
유형수의 여편네야! 안 나갈래?"
  "얘야, 얘야,  얘야...." 노인이 당황해서 말했다.
"악시냐, 그렇게 소리치는 게 아니다,
얘야... 우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아이를 잃었잖아..."
"무리가 아니지...'라..."
악시냐는 노인의 흉내를 냈다.
"오늘 밤만은  집에서 재 워도 좋지만,
내일이면 저 여자를 싹 쫓아낼 거예요!
'무리가 아니지'라니!..."
그녀는 다시 한 번 흉내를 내고는 깔깔 웃으며 가게 쪽으로 가버렸다.

가게의 지붕과 문에 새로 칠을 하고 나니 마치 새 집처럼 산뜻했다.
창가에는 예전과 같이 제라늄이 즐거운 듯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3년전 그리고리네 집안과
안 뜰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이제 거의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때나 마찬가지로 아직도 그리고리 노인이 이 집의 주인이기는 했지만,
사실상 실권은 모조리 악시냐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물건을 사고 파는 것도 그녀 가 도맡아 했으며,
그녀의 동의가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벽돌공장도 잘 되어가고 있었다.
철도 공사 때문에 벽돌의 수요가 늘어나 1천 개에 24루블 까지 뛰었다.
부인네들과 처녀들이 정거장까지 벽돌을 운반해서
그것을 화차에 실어주고 일당 25코페이카씩 받고 있었다.
악시냐는 풀뤼민 집안과 동업을 했다.
그들의 공장은 이제 '플뤼민아우 회사' 라 불리고 있었다.
그들은 정거장 근처에 술집을 차렸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그 값비싼 아코디언을 타는 소리가
공장 쪽에서가 아니라 술집에서 흘러나왔다.
이 술집에는 최근에 무슨 거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우체국장과 역장도 자주 드나들었다.

귀머거리 스테판은 플뤼민 아우 집안 사람에게서 금시계를 선물로 받았다.
그는 연방 그 시계를 주머니에서 꺼내서는 귀에 갖다대고는 했다.
  마을에서는 악시냐가 대단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그녀가 아침마다 그 앳된 미소를 띠고
아름답게 빛나는 행복한 얼굴로 마차를 타고 자기 공장으로 나가는 모습이나
공장에서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 있는 모습 을 보면,
그녀가 정말 대단한 권력을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집과 공장과 마을 그 어디에서나 모두  그녀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우체 국에 들르면 국장이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자, 앉으시죠, 악시냐 부인."
  나이가 지긋한데도 엷은 나사로 지은 소매없는 외투를 걸치고,
니스 칠을 한 긴 장화를 신고 다니는
한 멋쟁이 지주가 그녀에게 말을 판 적이 있었는데,
그 지주는 그녀의 화술에 매혹되어 그녀가 값을 깎아 달라는 대로 깍아 주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명랑하면서도 교활한 빛이 흐르는 그녀의 눈 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악시냐 부인, 부인 같은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이라면,
저는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제발 말씀해주십시오,
언제 당신과 조용히 만날 수 있을까요?"
"네, 언제라도 당신이 편리하실 때면 좋아요!"
  그후부터 이 나이 지긋한 사나이는
거의 매일같이 맥주를 마시러 가게에 들렀다
이 맥주란 게 형편없는 것으로 제비쑥같이 쓴 맛이 났으나.
지주는 자꾸만 머리를 저으면서도 그것을 마셨다.
 
그리고리 노인은 이미 장사에서 손을 떼고 전혀 간섭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중에 모아놓은 돈도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그는  진짜 돈과  가짜 돈을 분간 할 수 없어
돈을 모아둘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입을 다물고, 자기의 이런 약점에 대하여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식구들은 이제 식사시간에 그가 안 보이더라도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되었다.
그래서 바르바라는 곧잘 이런 말을 했다.
  "우리집 양반은 어제도 아무 것도 안 들고 주무셨어."
이미 그런 데는 익숙해져 버려서 예사롭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골짜기 (In the Ravlne) 17.

 

 

 

 

어찌 된 까닭인지 노인은 여름이고 겨울이고
변함없이 털가죽 외투를 입고 밖으로 돌아다녔다.
아주 더운 날이 아니면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털가죽 외투의 깃을 세워서 몸을 꼭 감싸고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거나, 큰 길을 따라서 정거장 쪽으로 걸어가거나,
혹은 교회의 문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거나 했다.
벤치에 가만히 앉아서 몸을 까딱도 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이 인사를 해도 답례를 하지 않았다.
여전히 농부들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누가 무얼 물으면 정확하고 정중한 말로 짧게 대답했다.
마을에서는 그가 며느리한테 쫓겨나서 먹을 것도 못 얻어먹고,
사람들의 시혜를 받아 겨우 연명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재미있어 하는 사람도 있었고, 가엾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바르바라는 점점 살이 올라 안색이 환하게 피어났다.
여전히 자선을 베푸는 데에 힘쓰고 있었다.
악시냐도 그것만은 방해하지 않았다.
잼의 저장이 많아져서 이제는 새 딸기가 날 때까지
도저히 다 먹어치울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내버려두면 점점 굳어지므로, 바르바라는 그 잼의 처치에 골머리를 앓았다.

아니심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청원서 같은 큰 종이에
전처럼 달필로 쓴 운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로써 그의 친구 사모르도프와 함께
유형을 가 있는 게 분명해졌다.
그 운문 밑에는 가까스로 읽어볼 수 있는 서투른 글씨로
단 한 줄 이런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
저는 여기서 계속 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고통스러워요. 부탁입니다. 저를 구해주세요.'

어느 화창하게 갠 가을날 저녁 때,
그리고리 노인은 교회의 문 옆에 앉아 있었다.
털가죽 외투의 깃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코끝과 모자챙 밖에 보이지 않았다.
긴 벤치의 다른 한쪽 끝에는 도급 목수인 옐리자로프와
일흔 살이 다 돼 이가 빠졌는데도
학교의 수위 노릇을 하고 있는 야코프 노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목발과 수위 영감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식들이 늙은이를 봉양해야지...  너의 부모를 공경하란 말이 있지 않나."

야코프는 자못 분개하여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말이야, 그 집 며느리는 말이야,
시아버지를 집에서 쫓아낸 거야. 그것도 시아버지가 산 집에서 말이야.
영감은 지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벌써 사흘이나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더군."
  "사흘씩이나!" 목발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보라구, 저렇게 가만히 앉아서 아무 말도 못해.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거야.
그 런데 왜 가만히 앉아만 있는지. 고소하면 안될까...
재판소에서까지 설마 그 여자를 두둔 할라구."
  "재판소가 누구를 두둔한다구?"
목발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라구?"
  "그래도 그 여자에게는 좋은 점도 있다구.
일 하나는 착실하게 하고 있잖아.
그 집은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지가 안 된다구...
이를테면 나쁜 짓을 하지 않고서는 지탱을 못한단 말이야."
  "시아버지가 산 집에서 시아버지를  쫓아버리다니."
야코프는 여전히 성이 나서 소리쳤다.
"자기가 돈을 모아서 산 집이라면 사람을 쫓아내도 어쩔 수 없지만! 쯧쯧,
생각만 해도 비위가 상하는 년이야! 천벌을 받을 년!"

그리고리 노인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꼼짝달싹도 않고 앉아 있었다.
"자기 집이건 남의 집이건 마찬가지야,
따스하고 여자들이 바가지만 긁지 않으면 말이야... "
목발이 말하며 웃었다.
"이래뵈도 난 젊어서는 우리 나스타샤를 무척 좋아했었지.
얌전한 여자 였어. 얌전한 건 좋은데,
나스타샤는 두 마디째에는 벌써 '당신 집을 사세요! 당신 집을 사세요!
당신 집을 사시라구요!' 했었지.
임종시에도 '여보 경주용  마차를 한 대 사세요.
뭐 당신이라고 항상 그렇게 터덜터덜 걸어다녀야만 하나요' 
어쩌고 하면서 지껄여댔지.
그런데도 내가 그 여자에게 사준 것이라고는 고작 생강떡 정도였으니."

  "그리고 말이야, 그 여자의 남편은 귀머거리에다 더구나 등신이야."
야코프는 목발이 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말만 계속했다.
"쓸개 빠진 얼간이 자식 같으니.
말하자면 꼭 거위 새끼 같은  놈이야. 그 자식이 아는 게 뭐 있나?
거위란 놈은 여보게, 몽둥이로 대가리를 쳐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던가."
목발은 공장 안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났다.
아코프도 일어났다.
둘은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나란히 걸어갔다.
그들이 50보쯤 걸어 나갔을 때 그리고리도 따라 일어나서,
마치 빤질빤질 미끄러운 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런 걸음걸이로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느릿느릿 걸어갔다.
 
마을은 이미 저녁 어둠에 싸여 있었다.
태양은 뱀처럼 꿈틀꿈틀 기어올라간 길의 위쪽만을 비추고 있었다.
할머니들이 숲에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모두들 여러 가지 버섯이 들어 있는 바구니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정거장에 나가서 화차에 벽돌을 싣는 일을 하고 있는
부인네들과 처녀들도 떼를 지어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들의 코와 양쪽 눈밑의 뺨에 붉은 벽돌 가루가 묻혀져 있었다.
다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앞장 서서 걸어오고 있는 게 리파였다.
그녀는 이날  하루도 무사히 마치고
편히 몸을 쉬게 되는 것이 매우 즐겁다는 듯이,
가슴을 펴고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가냘픈 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행렬 중간쯤에 역시 날품팔이를 하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 플라스코비야가 끼여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 꾸러미를 들고
언제나 처럼 헐떡헐떡 가쁜 숨을 쉬면서 걷고 있었다.
  "안녕, 마카뤼치!"
리파는 목발을 보자마자 인사를 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안녕, 리퓌니카!"
목발이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아주머니, 처녀들, 이 돈 많은 목수 영감을 사랑해주시라구요!
하하! 얘들아, 얘들아, 나의 귀여운 아가들아!"

목발과 야코프는 저리 지나갔으나 두 사람의 이야기 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이윽고 리파의 일행은 그리고리 노인을 만났다.
그러자 갑자기 모두들 말문을 닫고 잠잠해졌다.
리파와 플라스코비야만 잠시 줄에서 조금 뒤쳐졌다.
노인과 스쳐 지나가게 되었을 때 리파가 정중히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어머니도 함께 인사했다. 노인은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술이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리파는 어머니가 들고 있던 꾸러미에서
피로시키(고기와 야채로 속을 넣은 러시아 식 만두: 역주)
한 개를 꺼내어 노인에게 주었다.
노인은 그것을 받아 들고 먹기 시작했다.
해는 아주 넘어가 버려 길 위쪽을 비추고 있던 빛까지도 이미 사라져버렸다.
주위에는 어둠이 깃들고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리파와 플라스코비야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오래도록 성호를 그었다. ㅡ <끝>
 

 

 

 

 

체호프 연보
출생 1860.1.29~ 사망 1904.7.15

1860

1월 29일 러시아 타간로크 출생.

1883

단편 <관리의 죽음> 집필.

1884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 졸업.

1887

희곡 《이바노프 Ivanov》 초연.

1888

중편 《대초원》 발표.

1889

《지루한 이야기 Skuchnaya istoriya》 집필.

1890

사할린섬에서 제정 러시아의 감옥제도 실태 조사.

1892

《결투 Duel’》 발표.

1895

르포르타주 《사할린섬 Ostrov Sakhalin》 발표.

1898

희곡 《갈매기 Chaika》 초연.

1899

《개를 데리고 있는 부인 Dama s sobachkoy》 발표.
희곡 《바냐 아저씨 Dyadya Vanya》 초연.

1901

《세 자매 Tri sestry》 초연.

1904

《벚꽃 동산 Vishnyovy sad》 초연.
7월 15일 독일 요양지 바덴바덴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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