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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지니아 울프를 만나다 & 어느작가의 일기

 

 

 

 

 

Adeline Virginia Woolf

 

버지니아 울프 

 

 

 

 우리는 모두 외롭게 사라진다"

 

'의식의 흐름'기법을 완성한 현대소설의 슬픔 여전사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의 작품보다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로 우리에게 익숙해진 작가다.

 

사람들은 울프의 소설보다 먼저 그의 특이한 이름과

 

청초하리  만큼 가늘고 긴 얼굴, 긴목을 생각한다

 

슬픔을 지닌채로 살아가던 그의 삶이 애닯게도 생각되고

 

 

 

그의 공식 학력은 무학이다

 

그런 그가 59세가 되던 1941년 어느날 큼직한 돌멩이를 코트 주머니에 가득넣고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다....쓸쓸함으로...

 

 

 

"우리는 각자 홀로 죽어 가노라 그러나 나는 좀 더 거센 파도 밑에서 그 보다 더 깊은 심연에 가라 앉노라

 

우리는 침묵을 무릅쓰고 달린다. 우리는 침묵할 것이 분명하다..."

 

 

 

 

 

 작가 소개---

 

위대한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문학사에서 페미니즘과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20세기 주요 작가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 영국, 빅토리아 시대 풍의 관습, 자유주의와 지성이 적절하게 혼합된 단란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레슬리 스티븐 경은 빅토리아 시대의 저명한 평론가·전기작가·학자로 『18세기 영국 사상사』의 저자이자 『국제 전기 사전』의 편집자였다. 그녀의 어머니 줄리아는 소문난 미인이자 문학계의 안주인으로 스티븐 가문을 이끌었다. 특히 버지니아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버지의 교육이었는데, 그녀는 감성적으로 읽는 법과 훌륭한 글을 감상하는 법을 아버지에게서 배웠으며 세인트 에이브스의 별장에서 보낸 어릴 때의 여름철 경험이 그녀와 바다를 밀접하게 만들었다.

부모가 죽은 뒤로는 남동생 에이드리언을 중심으로, 케임브리지 출신의 학자 ·문인 ·비평가들이 그녀의 집에 모여 '블룸즈버리그룹'이라고 하는 지적 집단을 만들었으며, 리튼 스트레치, 로저 프라이, 레너드 울프, 클라이브 벨, 던컨 그랜트, J.M. 케인즈, 데스먼드 매카시 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미술, 문학, 인생, 정치, 경제, 그 밖의 모든 문제를 논하고 사상을 연마했다. 1905년부터는 『타임스』지(紙) 등에 문예비평을 써 왔고, 1912년 정치평론가인 L.S.울프와 결혼하였다.

1915년 처녀작 『출항』을, 1919년에는 『밤과 낮』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다 같이 전통적 소설형식을 따랐으나 1922년에 나온 『제이콥의 방』에서는 주인공이 주위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과 주위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주는 인상을 대조시켜 그린 새로운 소설형식을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수법을 보다 더 완숙시킨 작품이 『댈러웨이 부인』(1925)이었다. 그 사이 평론 『현대소설론』(1919)과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1924)에서는 또 새로운 실험적 소설이 갖추어야 할 요소를 논하고,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진실에 대한 관점도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1927년에는 소녀시절의 원체험(原體驗)의 서정적 승화라고도 할 수 있는 『등대로』를 발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인간 심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를 추구하며 시간과 '진실'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제시하였다. 친구 S.웨스트의 전기 『올랜도 Orlando』(1928)는 그와 같은 수법의 좋은 예이다. 1931년에 발표한 『물결 The Waves』은 소설이라기보다 시에 가까우며 그녀의 사상의 궁극과 한계를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 발표한 『세월』(1937) 『막간 Between the Acts』(1941)에서는 또다시 전통적인 수법으로 돌아갔다.

이 밖에 문예평론집에 『일반독자 The Common Reader』(2권, 1925∼1932), 여성론 『자기만의 방 A Room of one's Own』(1929) 등이 있다. 1941년 3월 28일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기고 우즈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원인은 소녀시절부터의 심한 신경증이 재발한 데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보, 나는 내가 다시 미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우리가 또다시 그러한 지독한 시간을 극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다시 건강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 당신은 놀라울 정도로 나를 참아냈고, 나에게 너무나 잘해주셨습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군요. 누군가 나를 구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당신이었을 겁니다. 당신의 호의에 대한 확신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이 나를 떠났습니다. 나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두 사람도 우리들보다 더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 『자기만의 방』과 『3기니』등은 1970년대 이후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재평가되면서 울프의 저작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따. 특히 그녀의 작품 『자기만의 방』이 피력한 여성의 물적, 정신적 독립의 필요성과 고유한 경험의 가치는 수십년이 흐름 우리 시대의 인식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느 작가의 일기 /버지니아 울프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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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


20세기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가 27년에 걸쳐 쓴 일기를 남편 레너드가 편집하였다. 블룸즈버리의 귀부인, 부르주아 페미니스트, 난해한 모더니스트 작가이자 까탈스런 비평가, 의문으로 가득한 결혼 생활, 그리고 우울증과 신경쇠약……. 소설과 생활이라는 두 세계에서 동시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더 이상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 극도의 피로를 호소하기도 하고, 의붓오빠들의 성추행과 이중적인 성규범의 사회적 압박에 시달렸던 어린 날의 기억으로 답답하기도 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내면을 들추어 볼 수 있는 개인적인 기록이다.

이 책은 울프가 본격적으로 작품 세계에 골몰하기 전에 일종의 연습장처럼 활용했던 일기를 모아 엮은 것이다. 문학에 투신하여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버지니아 울프의 내면의 기록은 자신의 작품보다 자기 삶에 덧씌워진 여러 이미지들로 사람들 사이에서 기억되는 그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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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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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과 낮』
“인간 전체를 바라보고, 또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 쓸 때, 어떻게 우울해지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나 나는 희망을 잃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 『밤과 낮』의 후반부만큼 즐겁게 글을 써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사실 이 책의 어느 부분도 『항해』만큼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 1919년 3월 27일 일기에서

『제이콥의 방』
“내 마음속에서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무엇인가 말하는 방법을 (나이 40이 되어) 찾아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사실이 내게 아주 소중하므로, 나는 이제 누가 칭찬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 1922년 7월 26일 일기에서

『댈러웨이 부인』
“감히 말하건대 나는 이 책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있다.

 

정직하게 말해서 내가 더 이상 한 줄도 더 쓸 수 없게 될 때까지 나는 글을 써 나갈 작정이다.” --- 1923년 10월 15일 일기에서

『등대로』
“내 평생을 통해 가장 빠르고 가장 자유롭게 글을 쓰고 있다.

 

… 이것은 내가 제 길에 들어섰다는 증거다. 그리고 내 영혼 속에 열린 과일도 여기서 거둬들이면 된다.” --- 1926년 2월 23일 일기에서

『올란도』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쩌다 그처럼 그 자체로 강한 힘을 가지게 된 것일까!

 

 마치 태어나기 위해 주위의 모든 것을 밀쳐낸 듯하다.” --- 1927년 12월 20일

『자기만의 방』
“작품 안에 날카로운 여성적 울림이 있어, 내 친한 친구들이 이 책을 싫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그러나 ??자기만의 방??은 열의와 확신을 가지고 썼다.” --- 1929년 10월 30일 일기에서

『파도』
“이 황홀한 책이 가지고 있는 힘은 하늘만이 아실 것이다.” --- 1931년 8월 15일 일기에서

『세월』
“이 책은 팽팽하고, 현실적이고, 활기찬 책이다.

 

 … 그 안에는 보다 많은 “현실적인” 인생이 있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피와 뼈가 있다.” --- 1936년 11월 30일 일기에서

『3기니』
“『3기니』는 나를 압박해 왔고, 내 안에서 분출되어 나왔다.

 

   만약에 이 책이 미덕의 증거가 된다면, 그 미덕은 육체적인 화산과 같은 것이다.” --- 1937년 10월 12일 일기에서

『막간』
“어젯밤 런던에 심한 공습이 있었다. 방송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포인츠 홀』(훗날의 『막간』)을 착실히 써 나가고 있다.”  1940년 9월 18일 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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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버지니아 울프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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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버지니아 울프

블룸즈버리의 귀부인, 부르주아 페미니스트, 난해한 모더니스트 작가이자 까탈스런 비평가, 의문으로 가득한 결혼 생활, 그리고 우울증과 신경쇠약…. 한 시대를 풍미한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듯 버지니아 울프 역시 자신의 작품보다는 자기 삶에 덧씌워진 여러 이미지들로 사람들 사이에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그 각각의 이미지들은 복잡다단한 작가 울프의 생애 중 어느 일면만을, 그것도 흥미로운 부분만을 간추려 축소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누구나 울프를 회고하고 추모하며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울프를 모른다.
『어느 작가의 일기』는 버지니아 울프가 27년에 걸쳐 쓴 개인적인 기록을 남편 레너드가 편집한 것이다. 레너드는 울프가 1915년부터 죽기 3주 전인 1941년까지 계속해서 일기를 썼다고 밝히고 있다. 레너드는 그중 울프의 작가 경력이 절정에 이른 시기인 1918년부터 1941년까지 씌어진 일기에서 문필 활동과 관련된 내용만을 추려 『어느 작가의 일기A Writer's Diary』라는 제목으로 출간한다.

버지니아 울프, 문학에 투신한 삶의 기록

“죽기 전에 뭔가를 써 놓고 싶은 끝없는 욕망, 덧없고 열띤 인생에 대한 느낌이 나로 하여금 바위 위에 있는 사람처럼 단 하나의 말뚝에 매달리게 만든다.” - 1927년 12월 20일 일기에서

『어느 작가의 일기』는 울프가 본격적으로 작품 세계에 골몰하기 전에 일종의 연습장처럼 활용했던 일기를 모아 엮은 것이다. 그런 울프의 일기를 읽다 보면 울프가 구상했던 작품과 그녀의 일상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지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느껴지는 기묘함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문학에 바쳤던 울프의 열정을 증명한다.
울프는 실제로 소설과 생활이라는 두 세계에서 동시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더 이상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 극도의 피로를 호소하고 있기도 하다. 화제의 중심에 섰던 작가이자 『가디언』과 『타임스』에 글을 기고하던 촉망받는 비평가로서 울프는, 당대의 시대상뿐만 아니라 〈블룸즈버리 그룹〉을 중심으로 한 개인적인 친분 관계, 결혼 생활, 그리고 어린 시절의 경험까지도 문학과 비평의 주제로 흡수했다. 『어느 작가의 일기』는 이처럼 자신의 삶을 온전히 문학에 투신했던 작가의 내밀한 문학적 실험 공간을 열어 보여 주고 있다.

좌절과 희망의 경계에서 써 내려간 일기

“어찌하여 인생의 모든 호사와 사치는 남성인 줄리언이나 프랜시스에게만 주어지고, 여성인 페어나 토마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 1928년 10월 7일 일기에서

『어느 작가의 일기』는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성 작가의 성찰의 여정을 담고 있다.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이 울프는 “영국에서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여자(1925년 9월 22일 일기에서)”였다. 그 자리에 서기까지 울프는 어렸을 때는 의붓오빠들의 성추행과 이중적인 성규범의 사회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으며, 커서는 배타적인 남성 문인 집단과 대학 학감들의 위세에 짓눌려 있어야 했다. ‘여성’ 작가가 된다는 것이 엄청난 도전이었던 시대에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고 있는 울프의 일기는 좌절과 희망의 틈바구니에서 피어난 들풀 같은 생명력을 발하고 있다.
따라서 자기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안절부절 못 하고 혹평에 좌절하는 신경쇠약증 환자로서의 울프만을 기억하는 것은 울프의 삶과 문학에 대한 온전한 평가라고 볼 수 없다. 울프는 실제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생각했던 당대의 지배적인 시선을 민감하게 의식하면서 강박증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매달렸지만 결코 세간의 혹평과 자신의 우울증에 굴복하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는 작품 속 여주인공의 입을 빌어 “이 사회는 완전히 부패했다, 따라서 그 사회가 주는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다.”라고 외치며 대학의 명예 학위와 국가 훈장 제안을 당당하게 거절하는 울프의 모습에서 기만과 특혜, 그리고 관습과 나태함에 저항하는 투사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울프는 세상과 더불어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어느 작가의 일기』가 이미 상당한 명예와 지위를 획득한 저명한 작가의 정제된 일대기라기보다 ‘투쟁지’처럼 읽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세기 모더니스트가 21세기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또 남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글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그리고 영원히 나 자신의 주인이다.” - 1937년 8월 6일 일기에서

2009년 〈도서출판 이후〉에서 펴낸 『어느 작가의 일기』는 레너드가 편집한 울프의 일기를 국내 최초로 완역한 것이다. 국내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권위자인 박희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現 〈버지니아 울프 학회〉 고문)는 시대의 결과 울프의 감수성을 되살리는 번역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독자들이 울프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국내?외의 참고 도서를 섭렵하여 꼼꼼한 주석을 달아 한국어판 『어느 작가의 일기』의 완성도를 높였다.
동시대인들과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거리감, 읽을 수도 없고 쓸 수도 없는 극도의 피로감, 끊임없는 고쳐 쓰기의 과정에서 느끼는 지리멸렬함, 이 모든 것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오늘의 “버지니아 울프”를 있게 한 그 고단한 여행의 경로가 『어느 작가의 일기』에 담겨져 있다. 여성으로서 자신은 국외자이며, “여성의 조국은 세계”라고 말했던 울프, 여성들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던 울프, 극한 상황에서도 평화를 주장했고, 친구들의 죽음과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도 자신의 문학적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던 울프의 모습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울림을 남긴다. 울프와 친교를 나눴으며, 마찬가지로 저명한 소설가였던 엘리자베스 보웬은 “『어느 작가의 일기』는 버지니아 울프 자신이다.”라고 평했다. 이 일기를 통해 작가이자 비평가, 이론가로서 더 인간적이고 성찰적인 울프의 진면목이 드러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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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울프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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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1월 25일 런던 켄싱턴 구 하이드파크 게이트에서 태어남.
1888년 의붓오빠 제럴드 덕워스의 성추행이 시작됨.
1895년 5월 5일 어머니의 사망에 따른 큰 정신적인 충격으로 이 해 여름에 최초의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남. 이후 10여 년간 조지 덕워스에게서 성추행 당함. 언니 바네사는 슬레이드 미술학교에 다니게 되지만 버지니아는 주로 아버지에게서 어학을 비롯한 교육을 받음.
1897년 1월 3일 일기를 쓰기 시작함. 이복언니 스텔라의 사망. 1900년까지 간헐적으로 대학 야간 수업을 들음.
1899년 오빠 토비가 케임브리지에 입학하고 리튼 스트레이치, 훗날 남편이 되는 레너드 울프, 훗날 버지니아의 언니와 결혼하게 되는 클라이브 벨 등과 친교를 맺음.
1904년 3월 22일 아버지의 사망. 켄싱턴에서 블룸즈버리의 고든 광장 46번지로 이사함. 버지니아가 쓴 서평이 12월 14일에 최초로 『가디언』지에 무명으로 실림.
1905년 이 해 가을부터 1907년까지 간헐적으로 야간 노동자 대학에 나가서 가르침.
1906년 두 살 위의 오빠 토비가 그리스에서 장티푸스로 사망.
1907년 언니 바네사 결혼. 언니 부부가 고든 광장에서 살고 버지니아와 동생 에이드리언은 피츠로이 광장 29번지로 이사함. 근처에 살던 던컨 그랜트와 케인즈와 함께 목요일 밤 일층의 에이드리언 서재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모임이 〈블룸즈버리 그룹〉으로 이어짐. E. M. 포스터와 레너드도 상경하거나 귀국할 때마다 이 모임에 참석했음.
1908년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러먼트』지와 『콘힐』지에 기고하기 시작. 처녀작 『항해The Voyage Out』를 쓰기 시작함.
1909년 리튼 스트레이치가 구혼했으나 무산됨.
1910년 11~12월 여성해방운동에 참가함. 화가이자 비평가인 로저 프라이와 알게 됨.
1912년 8월 10일 레너드와 결혼. 플리트 가 뒤편의 클리포드 인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함.
1913년 버지니아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결론을 얻음. 6월 9~12일에 뉴캐슬에서 열린 여성 노동자 조합대회에 참석함. 『항해』의 원고를 완성한 다음 병세가 악화되어 요양소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자살을 기도함.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 얼마 뒤 울프 부부는 런던 남쪽 교외의 리치먼드에 있는 호가스 하우스로 이사함. 영국 남쪽의 서섹스 주 루이스 근교에 있는 우즈 강이 바라다 보이는 로드멜이라는 마을에서 아샴 하우스를 빌려 해마다 여름을 그곳에서 지냄. 건강이 회복됨.
1915년 3월 최초의 장편소설인 『항해』를 의붓오빠 제럴드가 경영하는 덕워스사에서 간행함.
1916년 T. S. 엘리엇, 캐서린 맨스필드와 알게 되어 친분을 유지함.
1917년 수동 인쇄기를 구입하며 아마추어 출판을 목적으로 하는 호가스사를 기획함. 단편소설 「벽위에 난 자국The Mark on the Wall」을 찍음.
1918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Ulysses』 간행 권고를 받았으나 거절함. 11월에 세계대전이 끝나고 같은 해에 여성참정법안이 통과됨.
1919년 훗날의「현대 소설Modern Fiction」을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러먼트』에 발표함. 9월 1일 로드멜의 아샴 하우스를 돌려주고 강 맞은편의 멍크스 하우스를 빌려 그곳으로 옮김. 이곳의 별채가 버지니아의 평생 서재가 됨. 10월 20일에 『밤과 낮Night and Day』을 덕워스사에서 간행하여 언니에게 바침.
1920년 세 번째 작품 『제이콥의 방Jacob's Room』을 구상하고 집필을 시작함.
1922년 시인이며 소설가인 빅토리아 색빌 웨스트Victoria Sackville-West와 친교를 맺음. 9월에 『댈러웨이 부인Mrs. Dalloway』으로 발전할 「본드가의 댈러웨이 부인Mrs. Dalloway in Bond Street?을 씀. 10월 27일에 『제이콥의 방』을 호가스사에서 간행함으로써 덕워스사와의 인연은 끊김.
1924년 서재 확장을 위해 타비스톡 광장 52번지에 집을 빌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현대소설을 주제로 강연함. 이 원고를 정리하여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Mr. Bennett and Mrs. Brown」이라는 제목으로 10월 30일에 발표함.
1925년 4월 「현대소설」을 포함한 스물한 편의 논문을 모아 『일반 독자The Common Reader』를 간행하여 스트레이치에게 바침. 5월 14일 네 번째 장평 『댈러웨이 부인』을 간행함. 5~7월 사이에 다음 작품 『등대로To the Lighthouse』를 구상함. 크리스마스에 켄트 주 놀Knole의 오래된 성곽에 살고 있는 비타를 찾아가는데, 이것이 『올란도Orladndo』를 계획하는 계기가 됨.
1927년 5월 5일 다섯 번째 장편 『등대로』가 간행되어 호평을 받음. 인쇄 수입으로 자가용을 구입함. 10월 8일 『올란도』의 집필을 시작함.
1928년 4월에 중부 프랑스의 드라이브 여행에서 돌아온 뒤 페미나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을 암. 5월과 10월에 케임브리지의 여학생 기숙사에서 강연함. 6월에 『올란도뮡의 한정판을, 10월에 보급판을 간행함. 원고를 첨부하여 작품의 모델이 된 비타에게 바침.
1929년 3월에 지난해 두 번에 걸쳐 행한 강연을 보강하여 「여성과 소설Women and Fiction」을 완성하고 『파도The Waves』를 쓰기 시작함. 10월 24일에 「여성과 소설」을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으로 개명하여 간행. 큰 성공을 거둠.
1930년 4월에 『파도』의 초교를 끝냄.
1931년 1월 21일 〈피파 소사이어티Pippa society〉에서 「여성들의 전문직Proffessions for Women」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함. 『자기만의 방』 속편을 쓸 생각을 함. 10월 8일에 여섯 번째 장편 『파도』를 간행함.
1933년 1월에 『플러쉬Flush』를 탈고함. 2월에 『파지터 가 사람들The Pargiters』의 제 1장을 완성함. 3월에 맨체스터 대하에서 학위 증정을 제의받았으나 사양함. 10월 5일에 『플러쉬』를 간행함.
1935년 9월에 『파지터 가 사람들』을 『세월The Years』로 개명하고 『3기니Three Guineas』를 계획함. 이 해에 문화수호 국제작가대회의 임원으로 추대됨. 같은 해에 국가명예훈장Companion of Honor 후보로 추천하겠다는 수상의 편지를 받았으나 사양함.
1936년 2월 9일 반파시스트 집회에 참석함. 『세월』을 교정하면서 『3기니』의 집필도 시작함. 12월에 『데일리 워커』지에 「왜 오늘날 예술은 정치를 추종하는가Why Art Today Follows Politics」를 실음.
1937년 3월 15일 『세월』을 간행함. 조카 줄리언 벨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스페인 인민정부군에 가담하기로 결심함. 6월에 이르러 『세월』은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며 미국에서만도 2만 5천부가 팔림. 7월말 줄리언의 전사 통보를 받음.
1938년 1월에 『3기니』를 완성하고 로저 프라이의 전기에 착수하는데 다음 소설 『포인츠 홀Poyntz Hall』을 구상하느라 별 진전이 없음. 6월 3일에 『3기니』를 발간하여 연말까지 8천부가 팔리지만 미국에서는 평이 좋지 못함. 히틀러의 대군 집결에 걱정함. 이 해에 호가스사의 실무에서 물러남.
1940년 2월에 30년대 남성 작가들을 비판하는 「사탑The Leaning Tower」을 계획하여 5월에 브라이튼의 〈노동자 교육연맹〉에서 원고를 읽음. 5월에 독일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침입하고 6월 14일 파리가 함락되면서 로드멜에도 공습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짐. 7월 25일 『로저 프라이: 전기Roger Fry: A Biography』를 간행함. 8~9월에 런던은 거의 매일 공습을 받음. 9월 29일 로드멜의 서재 근처에 폭탄이 떨어지고 10월 17일 런던 집이 불탐.
1941년 2월 『포인츠 홀』을 『막간Between the Acts』으로 개명하여 완성함. 3월 28일 오전 11시경, 서재에 레너드와 바네사에게 짧은 글을 남겨 놓은 채 우즈 강가로 산책을 나가 돌아오지 않음. 이틀 뒤 시체가 발견됨. 7월 17일 유고작『막간』이 간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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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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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마음 속에 간직했었다....

 

그녀를 마음편하게 떠나 보내고 싶다....

 

나의 울컥하는 마음도 ,

 

그의 가슴아픈 삶도,

 

모두 그가 떠난 강물의 자리에서 홀연히 흘러 갈것이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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