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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ic. /classic.III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내 정신을 바꾸었는가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내 정신을 바꾸었는가
스티븐 존슨 著 (How Shostakovich Changed My Mind)

 

 

 

 

책소개------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그의 음악을 다루는 책들은 주로 그의 인생 역정에 주목한다. 20세기의 역동적인 역사와 드라마틱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BBC의 고전음악 프로듀서이자 고전음악 칼럼니스트인 스티븐 존슨은 쇼스타코비치를 이 역사적 틀 밖으로 꺼낸다. 쇼스타코비치의 어둡고 우울하고 폭력적인 선율이 어떻게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오히려 힘이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역사나 시대와 같은 거창한 압박과는 관계없는 작고 사적인 고통들, 다양한 우울증을 비롯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심리적인 고통에도 위안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스티븐 존슨은 올리버 색스와 같은 임상심리학자와 뇌과학자, 생물학자, 음악가 및 음악학자들의 저서들을 검토하면서 언어 이전의 힘을 지닌 선율이, 특히 어둡고 고통스러운 선율이 정신적으로 고립된 인간에게 힘이 되어주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 독특한 여정 속에서 독자들은 어느 하나의 이미지에 못 박히지 않고 기꺼이 모순될 수 있는 자유를 찾아가려는 한 작곡가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자신의 음악 속에 재현해 놓은 특별한 연대의 공간도 함께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 자신도 그 공간 안에 뛰어들어 음악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가장 힘찬 위안 속에 머무를 수 있음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머리말
쇼스타코비치는 내 정신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참고 문헌
감사의 말

 

 

 

著 : 스티븐 존슨

고전음악 저술가 겸 기획자. 영국 BBC 라디오 3의 주간 프로그램인 『음악의 발견』을 비롯하여 수백 편의 라디오 방송과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 및 출연했으며, 그의 저서 중에서 『말러, 그 삶과 음악』과 『클래식, 고전시대와의 만남』은 국내에도 출간되었다. 10대 때부터 양극성 성격 장애에 기반한 우울증을 앓았으며, 그로 인해 음악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내 정신을 바꾸었는가』는 바로 그 독자적인 탐구의 첫 결실이다.

 

책 속으로-----

 

1941년과 1942년 사이의 겨울, 도시는 나치 병력에 포위되면서 식량 공급이 전면 차단되었다. 게다가 기온마저 영하 30도로 곤두박질쳤다. 민간인 사망자 수는 매달 10만 명에 다다랐다. 일부는 체온 저하로, 대개는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가죽장화와 책 제본용 아교로 쑨 수프를 얻기 위해 줄 선 사람들, 길가에(어차피 집도 똑같이 추웠으니) 모여 웅크린 채 급조한 수신 장치로 라디오 레닌그라드의 방송을 듣는 사람들을 담은 사진과 그림들이 박물관에 걸려 있었다. 한 생존자의 딸은 더 이상 프로그램을 제작할 기운도 없을 만큼 쇠약해진 방송국 직원들이 똑딱거리는 메트로놈 소리를 내보냈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도시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였어요. 아직 살아있었던 거예요.”
--- p.16

“그때 기분이 어땠는지 짐작도 못할 거예요. 당신이 지옥 한가운데 있는데, 주변의 예술이란 것들은 텅 빈 미소를 지으며 여기가 천국이라고 속삭이죠. 그때 불현듯 ‘아니야, 우리는 고통 받고 있어, 그것도 아주 심하게 고통 받고 있다고!’라고 외치는 음악을 만난 거예요. 당신의 말을 들어주고 당신을 대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기뻐서 울고 싶어지는 거예요.”
--- pp.50~51

조증 비약과 내가 앞서 언급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에 대한 설명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하나 있다. 사납게 뿜어내는 튜바의 주제가 그보다 앞선 호른의 ‘구슬픈 동화’ 선율을 비슷하게 재연했듯, 회전목마풍의 행진곡과 열에 들뜬 현악 푸가도 특유의 동일한 음률 패턴, 즉 도입부 주제에서 들었던 최초의 패턴에 기초하고 있다. 이 비범한 악장에 등장하는 일견 불연속적인 요소들 중 다수가 주요 악상 중의 하나 또는 둘 다와 연결되어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폴로니어스가 절규하는 햄릿을 보며 말했듯 ‘이것은 광기일지언정 그 안에는 질서가 있다.’ 실제로 자기 삶을 헤쳐 나갈 때 그랬던 것처럼,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에서도 파도처럼 밀려오는 눈부신 착상들에게 자신을 그냥 내맡기지 않았다. 그는 심연을 가로지르는 밧줄을 쳐놓듯 이 주제들 사이를 연결한다.
--- pp.75~76

“내가 알기로 임상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거기에 사로잡혀서 더 나아가지 못할 수가 있어요. 작곡가가, 그리고 음악이 할 수 있는 건 몹시 극단적이고 고통스런 곳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일종의 사다리를 대주는 일이에요. 그 사다리의 효과 중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감정, 때로는 아주 아픈 감정 속으로 모험을 떠나도록 도와주는 거죠. 이 과정은 사람들에게 어떤 요소를 제공해요. (...) 말하자면 스스로의 감정들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들을 관찰하고 변화를 시도할 수 있죠. 아니면 최소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걸 깨닫거나요. 고통으로부터 정말로 아름다운, 창조적인 뭔가가 나타나고, 거기에 어떤 의미가 부여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게 돼요. 만약 누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딱 한 가지 특성만 들라고 한다면, 나는 이 말을 떠올릴 거예요. 의미만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을 다 견딜 수 있다고요.”
--- pp.103~104

필요하다면 여러 해 동안 음악은 무시무시한 바다 위의 구명 뗏목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 구원의 순간은 살아있는 타인이 우리를 보고 이해하고 아직 우리가 구조받을 가치가 있다는 신호를 보내줄 때에야 비로소 다가오는 것이다. 음악은 내게 구원 자체를 주지는 못했으나, 거기에 아주 가까이 데려다 놓아주었다.
--- p.173

‘방해도 위로도 받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공간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 역시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 이 사실은 그 말들이 반향할 수 있음을 뜻한다’고 오바흐는 말한다. 내가 정신 치료라는 제어된 환경 속에서 그 반향하는 말들을 찾은 것도 가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 감정이 담긴 ‘소리’를 발견하고, 그 소리들이 위대한 작곡가에 의해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듣는 일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반향을 가져왔다. ‘말들은 짓이겨진다 / 어려운 때가 오면, 금이 가고 때로는 부서진다’고 T. S. 엘리엇은 썼다. 언어는 그렇다. 그러나 (내 경험에 따르면) 음악은 그렇지 않다.
--- pp.195~196

이 공동체는 강요하지 않는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합창처럼 ‘만인이 형제가 되리라’ 외치지도, 의심하는 자에게 ‘이 동맹에서 울며 떠나라’ 명하지도 않는다. 쇼스타코비치는 함께하는 기쁨의 순간은 물론이고, 혹독한 고립의 순간에도 우리를 만나준다.

--- p.211

 

출판사 리뷰-----


음악은 어떻게 사람을 위로하는가
특히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절망에 빠진 이들을 어디로 이끄는가

음악은 어떻게 사람을 위로하는가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그의 음악을 다루는 책들은 주로 그의 인생 역정에 주목한다. 20세기의 역동적인 역사와 드라마틱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출간 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부터 소설가 줄리안 반스가 쓴 『시대의 소음』까지,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음악은 당대의 역사와 사회에서 좀처럼 분리되지 못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주의를 혐오한 공산주의자인가? 아니면 공산주의 자체를 혐오한 인물인가?’ ‘그의 음악은 사상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떠한 사상적 태도가 담겨 있는가?’

하지만 BBC의 고전음악 프로듀서이자 고전음악 칼럼니스트인 저자 스티븐 존슨은 쇼스타코비치를 이 역사적 틀 밖으로 꺼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는 쇼스타코비치의 어둡고 우울하고 폭력적인 선율이 어떻게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오히려 힘이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려 한다. 물론 여기에는 고전음악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라 할 수 있는(그리고 그만큼 자주 회자되는) ‘레닌그라드 전투’를 직접 겪은 이들의 이야기도 포함돼 있다. BBC의 라디오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직접 러시아에서 많은 인터뷰를 진행한 스티븐 존슨은 전쟁과 스탈린으로 인해 고통받던 러시아 민중들이 어떻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속에서 힘과 위안을 찾았는지를 알려준다.

그런 후에 이 책은 곧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왜냐하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다른 종류의 고통에도 유효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역사나 시대와 같은 거창한 종류의 압박과는 관계없는 작고 사적인 고통들, 다양한 우울증을 비롯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심리적인 고통에도 위안을 가져다준 사례들을 알려준다. 또한 스티븐 존슨은 올리버 색스와 같은 임상심리학자와 뇌과학자, 생물학자, 음악가 및 음악학자들의 저서들을 검토하면서 언어 이전의 힘을 지닌 선율이 정신적으로 고립된 인간에게 힘이 되어주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 사례 중에는 스티븐 존슨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조울증 진단을 세 차례나 받았고, 그중 한 번은 자살 고위험군에 속하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삶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그때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어떻게 자신을 붙들어 주었는지를 설명한다. 세상으로부터 홀로 격리되고 누구의 이해도 구할 수 없으리라고 절망했을 때, 논리와 언어의 세계 바깥에 있는 음악의 선율이 세상과 연결될 또 다른 가능성을 비춰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절망에 빠진 이들을 어디로 이끄는가

사회적·정치적인 상황 때문이건 아니면 개인적인 상황 때문이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다양한 이유로 고립된 존재들을 일종의 ‘공동체’로 인도한다. 음악 속에서 징후로서만 존재하는 공동체, 그러므로 거짓된 선전이나 약속을 하지 않는 순수한 희망으로서의 공동체다. 스티븐 존슨은 이러한 희망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속에 어떤 방식으로 삽입돼 있는지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다년간 음악 강연 및 음악 프로그램을 기획한 그는 최대한 음악 전문 용어의 사용을 배제하면서도 음악의 구조를 말끔히 드러내 보여준다. 독자들은 그가 분석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읽으면서’ 어떻게 음악 속에 메시지가 삽입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메시지의 정체는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겨우 200페이지 남짓한 이 작은 책은 이 모든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극적인 삶, 그런 삶을 산 그가 작곡한 음악이 지닌 특징과 담고 있는 메시지, 그리고 그 음악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인 작가 자신의 삶까지. 연구와 체험과 고백을 뒤섞은 이 ‘교양서’는 교양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에 따르면 교양은 ‘개별적이거나 사적인 것이 아닌 일반적이거나 공동적인 것을 지향하는 의식상태라는 점에서 하나의 일반적 감각이자 공동적 감각이기도 하다. 교양의 본질은 이점에서 바로 공동 감각이다.’ 이는 바로 이 책,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내 정신을 바꾸었는가』가 말하려는 바이기도 하다. 음악을 통해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이상한 공유지, ‘절반은 상상 속에 있고 절반은 실재하는 공동체.’ 독자들은 이 책 속에서 어느 하나의 이미지에 못 박히지 않고 기꺼이 모순될 수 있는 자유를 찾아가려는 한 작곡가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자신의 음악 속에 재현해 놓은 특별한 네트워크도 함께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 자신도 그 안에 뛰어들어 음악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가장 힘찬 위안 속에 머무를 수 있음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공동체는 강요하지 않는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합창처럼 ‘만인이 형제가 되리라’ 외치지도, 의심하는 자에게 ‘이 동맹에서 울며 떠나라’ 명하지도 않는다. 쇼스타코비치는 함께하는 기쁨의 순간은 물론이고, 혹독한 고립의 순간에도 우리를 만나준다.

-본문 211페이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