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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사전 - '외롭다'라는 말의 언저리들

 

 

 

마음'이란 우리말을 다른 나라의 말로 번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뒤늦게.
'감정'이라는 단어로도, '정신' 혹은 '심리'라는 단어로도, 그리고 '영혼'이라는 단어로도 마음
전체를 아우르질 못한다. '마음'이라는 말은 '몸'의 일부를 가리키는 말이자,
'몸' 전체를 포괄하는 말이다. 어딘가에서 한 사람의 몸에 들어있는 핏줄을 다 이으면
지구 몇 바퀴를 돌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마음도 그 가지 수를 나열하면 명왕성에
갔다 올 수 있을 길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몸보다는 마음이 발달되어 있고, 몸보다는 마음이 활달한 내가 할 수 있는 알맞은 글쓰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마음'의 무수히 중첩되고 해체되고 얽혀드는 순간순간들을

망연히 바라보고 살아가는, '마음'을 보는 망원경은 가지고 있되, 그 현미경을 안 가진

'한 사람'을 위하여 이런 형식의 글쓰기를 꼭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아랍에서는 '낙타'를 일컫는 말이 천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내가 잠시 살았던 열대의

 어느 나라에서도 '비'를 칭하는 낱말이 놀랠 정도로 무수히 많았다. 마음의 천만 갈래. 우리는

 마음이 발달한 혈통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많은 마음의 말들이

존재할 리 없다.

어느 날 문득, '마음'의 갈래를 칠백 가지 정도로 나누어 수첩에 적었다. 더 미세하게 나누고

 더 찾아보면 수천 가지는 될 듯했다. 비슷한 것들은 비슷한 듯도 하지만, 모두 다 다른 말들이다.

그 말들의 차이를 구별해 보고 싶다.

'외롭다는 힘으로 모서리를 날카롭게 빛내는 이곳에서 나는 외롭다.' 라는 말을 천천히 발음해본다.

 외로움이 부족해 피가 마르는 세상이 있고 중무장된 평화에 천천히 질식되는 너희가 있다.

외롭다
주체가 텅 비어있는 마음을 응시하는 중일 때 사람들은 '외롭다'라고 말한다. 텅 비어 있는

마음을 응시한다는 의미에서 이 말은 나의 어떤 정황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외롭다라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다. 활달히 움직이고 있는 동작 동사이다.

텅 비어버린 마음의 상태를 못 견디겠을 때에 사람들은 외롭다라는 낱말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발화한다. 이미 외로움을 어찌하지 못해 움직여대는 어떤 에너지가 담겨져 있다.

그 에너지가 외로운 상태를 동작동사로 바꿔 놓는다.

쓸쓸하다
'외롭다'라는 말에 비하면, '쓸쓸함'은 마음의 주체보다는 마음 밖의 정경에 더 치우쳐 있다.

정확하게는, 마음과 마음 밖의 정경의 관계에 연루되어 있다.

마음을 둘러싼 정경을 둘러보고는(응시하기보다는) 그 낮은 온도에 영향을 받아서 마음의 온도가

 내려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외로움은 갑자기 찾아오기 어렵지만, 쓸쓸함은 갑자기,

불현듯 찾아오기도 한다.

권태
'외로움'과 '쓸쓸함'의 끝자락에는 능동적인 움직임이 이어진다. 외로움이 고독이라면,

고독에게 파먹히고 있으면서도 파먹히는 제 살을 대안없이,

게으르게 바라볼 때가 '권태'의 상태이다.

아무 것도 진단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 상태라는 점 때문에 권태는

늘 만만한 상태에서 지속되고 진행되며 발전된다. 권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천장을

응시하며 벽지의 연속된 무늬를 하나하나 세는 일이다, 외로움은 괴롭지만,

권태로움은 괴롭지가 않다. 괴로운 상황이 괴롭지 않게 여겨진다는 그 점 때문에

조금 더 위험스럽다. 또한 마음의 병든 상태에 가깝다. 권태로부터 벗어나려면,

그 마음자리를 외로움의 상태로 다시 명명할 줄 알아야 한다. 외로움은 약 없이도

회복되지만(정확히 말하자면, 회복되지 않더라도 약 없이도 살아지지만),

권태는 최소한 '외로움'이란 외투로 갈아입어야 마음을 회복할 기미를 찾을 수 있게 된다.

무료하다
심심함과 외로움 사이에 무료함이 존재한다. 심심함에서 무료함으로,

무료함에서 외로움으로 진행되기 쉽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심심함은 무언가를 향해 손짓하고 있지만, 무료함은 아무 것에도 아직 손짓하지 않는다.

외로움은 그것을 못 견디겠는 어떤 활달한 에너지를 내재하고 있지만,

무료함은 에너지조차 비어있는 상태이다. 무료함이 아무 것에도 손짓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을 향해 손짓하는 방법을 '이미' 잃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하며,

방법을 잃어버린 그 자리에 '아직' 다른 에너지(이를테면, 외로움이 내재하고 있는

활달한 에너지 같은 것)가 대치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무료함은 무언가를

빈 입으로 우물거리며, 되새김질한다.

허전하다
상실감 같은 것. 무엇인가가 있다가 없어진 상태.

혹은 무엇인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 있지 아니한 상태. 그래서 허전함이라는 마음에는

무언가를 다 놓아버린 축 쳐진 손이 달려 있다. 그 손은 근육을 움직여 무언가를 잡으려 하지 않는다.

공허하다
'무상함'보다는 안절부절한 상태이며, 허탈함보다는 안정된 상태이다.

허전함의 손은 아무 것도 잡으려 하지 않지만, 공허함은 무언가를 잡아보려고

애써 보았던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후회' 같은 것이다. 휘둘렀던 무수한 손들이,

그 에너지들이, 공허함의 배면에는 보인다. 애쓴 흔적이 썰물처럼 쏴, 하며 빠져나가면서

무늬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애써 잡아보려고 마음을 크게 먹었을 때,

그것이 허탕이 되었다고 믿든, 무언가 잡히긴 했든 아니든, 잡긴 잡았는데,

꼭 쥔 손을 펴보았을 때에 그것이 초라해 보이든, 그것이 바로 잡으려던 그 어떤 것이든,

그 모든 손 안에 공허함은 존재한다. 공허함은 '휘둘러보았던' 마음의 손,

그 손의 무수한 경우의 수 안에 언제나 매복해 있다. 그런 점 때문에 '허전함'보다는

좀더 절대적이며, 훨씬 더 철학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도달해 있다.

적막하다
'외로움'의 농도가 가장 짙은 상태. 적막함은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이다.

'허전함'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축 쳐진 손을 소유한 마음이라면, '공허함'이 휘둘렀던

손의 무상함을 응시하는 마음이라면, '적막함'은 손을 잘라 떼어낸 '몸'이다.

모든 순간, 모든 사물들이 감옥처럼 늘 에워싼다. 그것도 좁은 반경을 그리지 않고,

 멀찌감치에서, 황량할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죽음처럼 싸늘한 온도를 지녔지만,

'적막'은 그것을 순치시키기 위하여 순간순간을 뜨개질한다. 걷는 걸음걸음으로써,

혹은 들이쉬고 내쉬는 한숨 같은 호흡으로써. 그럼으로써 영속된다. 찔레꽃 공주처럼

손을 찔리면서, 피를 낭자하게 흘리면서, 그렇지만 그 아픔과 고통은 인지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의 폐허를 뜨개질하는 숭고한 의식을 치르고 있기 때문에.

결핍
'공허'와 반대 극점에 있다. 공허와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다'라는 결론은 같지만,

그 과정이 다르다. 공허는 주체가 스스로 부여한 의미가 움켜진 손 사이로 자꾸만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은 것이라면, 결핍은 그 주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스스로가 아니라)

그 의미를 자꾸 흘려버리는 것이다. 철 지난 외투의 구멍난 주머니처럼. 혹은, 찾으려는

그것을 조금씩, 한없이, 뒤로 미루어, 채워지지 않는 상태를 지연시키고 있다. 영원한 미래처럼

허기
무언가 다른 것을 원하는 상태. '결핍'은 끝끝내 아무 것도 소화하지 못하고 체하지만,

'허기'는 모든 것을 너무 잘 소화하여 결핍된 상태이다.

 밑 빠진 독처럼. 눈 앞에 던져진 먹이 앞에서, 바로 이거였어, 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먹어치우지만 너무 빨리 소화를 끝내버렸거나, 다 먹은 후에 이것은 아니었어, 라고

슬프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래서 더 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결핍'은 결핍된

주체 스스로를 집어삼킬 수 없지만, '허기'는 허기를 느끼는 주체 스스로를 충분히

집어삼키고도 남는다. 왕성한 소화력. 끝나지 않는 식사. 결핍감은 껌을 씹으며 순간을

 모면할 수 있지만, 허기는 고기를 씹는 그 순간에도 포만감이 없다.

'허기'는 마음의 에너지가 마이너스적 과잉 상태에 도달해 있으며,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도달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허기'는 그 무엇보다 궁극적이다.

평화
진정으로 평화로운 순간은 그리 길지 못하다. 평화는 태풍의 눈이고, 안전지대이다.

그 주변을 에워싸며 휘몰아치는 태풍으로 중무장된. 겨우 쪼그리고 들어앉을 수 있는

마음의 공간. 내가 '평화롭다'고 느낄 때에 그것은 긴장감 없는 상태 중에서 가장 정화된

상태를 칭하는 것이지만, 나를 '평화롭게'하기 위하여 나를 둘러싼 우주는 막강한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평화'는 제 스스로 그 상황을 평화롭게 지속하기 위해서 초긴장의 상태를

견지해내기 때문에, 이내 소진되고 만다. 그러므로, 작디 작은 자극에도 평화는 순식간에

산산조각난다. 그리고 휘발된다. 평화의 지속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평화는 찰나에만 존재한다. 평화 그 이후는, '나태'로 변질되거나, '쓸쓸함'으로 변화된다. 고인 물이 썩듯이, 평화도 썩고야 만다.

'외로움'을 분절시키거나 가시화시키지 않고, 가지런히 돌볼 때 평화가 쉬이 찾아오지만,

그것은 활달한 외로움보다 진실되지 않은, 싸늘히 식은 시체처럼, 부패를 진행시키기 직전의

 '잠깐의 안식'일 따름이다. 평화 그 이후는 항상 평화의 직후에 온다. ▲

 

 

김소연 은 1967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가톨릭 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마쳤다.

1993년 계간 『현대시사상』에「우리는 찬양한다」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시집『극에 달하다』

(문학과지성사, 1996), 장편동화『오징어섬의 어린왕자』(웅진닷컴) 등의 저서가 있다.

 언제나, 마음이 가 있는 곳에 몸이 가 있기를 원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육체가

움직이지 않는 이상한 게으름과, '마음'이 움직이면 뜬금없이 부지런해지는 양 극단을

오가며 살아가고 있다. 현재, '마음' 혹은 '진실'을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 가지

노동을 잡다하게 하고 있으며, 이「마음사전」을 쓰는 일은 그러한 잡다한 노동 중의

하나이자, 노동의 막간에서 취하는 가장 행복한 휴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