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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ic. /classic.III

♠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어느 인문주의자의 클래식 읽기







바로크 시대 작곡가 바흐부터 현대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주앙 피레스까지!
인문주의자가 들려주는 음악가들의 생애와 시대

음악 담당기자이자 30여 년간 클래식 애호가로서 오랫동안 음악비평을 써온 저자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통해 독자들에게 매혹적인 클래식 이야기를 펼쳐낸다. 기존의 클래식 교양서들에서 남발되는 뻔한 에피소드나 공허한 수사를 최대한 지양하고, 음악을 감각의 기쁨과 위안을 주는 차원을 넘어 인간의 삶과 시대를 들여다보는 창으로서 이해한다.

특별히 주제에 따라 음악가들에게서 주목할 만한 에피소드들을 기록하고 그들의 음악 세계를 특유한 언어로 감각적으로 집어내, 여느 클래식 교양서 이상으로 인문학적 깊이와 즐거움을 더했다. 니체와 아도르노, 비트겐슈타인 등 인문학자로부터 음악을 이해하는 자극과 영감을 제공받았다 단언하는 저자는, 음악에 대한 애정을 폭넓은 도서로 연장시키며 그 노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여전히 클래식이란 지루하고 고루하며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급문화’라는 편견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클래식은 수많은 사연과 드라마들을 간직하고 있는 놀라운 이야기 상자와도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음악가의 삶을 따라가며 개인사에 중점을 두거나, 시대적 역할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고, 당대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음악이 주는 감각적 느낌을 즐길 수 있을 때, 사람들은 음악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다는 저자의 생각답게, 음악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숨기지 않는다.


 


-著.문학수


대학 시절부터 클래식 음반을 쫓아다닌 음악 애호가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 관현악과 피아노 독주다. 오랫동안 《경향신문》에 음악비평을 써왔으며, 채널예스에 음악칼럼 ‘내 인생의 클래식 101’, 서울시향의 기관지 『SPO』에 ‘20세기 음악 산책’ 등을 연재하고 있다. 경향신문사에서 문화부장을 두 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1 음악으로 가는 입구, 낯익은 이정표들
 바흐, 음악의 규범을 만든 현자
 하이든, 근대로 가는 징검다리
 하이든, 18세기 런던의 두 얼굴
 모차르트, 고단했던 천재의 삶
 슈베르트, 가난한 떠돌이의 31년

2 혁명에서 세기말까지
 베를리오즈, 몽상의 내러티브와 음악의 육체성
 쇼팽, 어두운 열정의 시인
 바그너, 도취와 열광의 신전에서
 브람스, 낭만의 끝자락에서 고전을 바라보다
 말러(1), 삶과 죽음, 현실과 천국 사이
 말러(2), 떨칠 수 없는 이중의 자의식

3 음악, 20세기를 바라보다
 드뷔시, 모더니즘의 새벽
 포레, 안식 혹은 슬픔
 에릭 사티, 기인으로 살았던 선구자
 야나체크, 피아노로 그린 내면의 풍경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불편하고 황홀한
 쇤베르크, 상처 입은 아방가르드
 쇼스타코비치(1), 예술과 생존의 이중구조
 쇼스타코비치(2), 영화음악 노동자의 애환

4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초상(肖像)
나치 시절, 떠난 자들과 남은 자들
 클라라 하스킬, 가혹한 육신이 남긴 빛나는 모차르트
 호로비츠, 영감과 즉흥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명상과 낭만의 접점
 글렌 굴드, 지식인 비르투오조
 지휘자 마렉 야노프스키의 정중동(靜中動)
 다니엘 바렌보임, 전인적 음악가
 마리아 주앙 피레스, 음예의 피아니즘


 


-책 속으로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 한 개인의 내면을 만나는 일인 동시에, 그가 살았던 시대와의 대면이기도 하다. 결국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개인사와 당대사를 씨줄과 날줄로 삼은 ‘음악의 생애’를 만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때로는 수백 년 혹은 수십 년 전에 이미 쓰인 음악을 우리가 듣는다 치더라도, 그 속에는 어느 시대에나 인간이 느껴왔을 보편적인 희로애락, 당대와의 갈등이나 타협, 때로는 권력을 향한 욕망 같은 것들이 여전히 살아서 흘러가는 것이다.--- p.14

적어도 지난 150여 년간 의심 없이 사용돼온 ‘천재’라는 찬사는 모차르트의 손끝에서 천상의 선율이 술술 풀려나왔을 거라는 상상을 부채질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과장된 이미지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 현실 속의 모차르트는 언제나 고달팠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유럽을 떠돌았고, 빈 시절에는 가족을 부양하고 음악가로 성공하기 위해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모차르트는 그렇게 현실에 쫓기면서 자신을 탕진했다. 그의 천재성은 보호받지 못했다.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아버지와 아내조차도 그의 육체와 정신이 쇠잔해가는 것을 우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훗날 천재라고 불리는 사내, 모차르트의 운명이었다.--- pp.66-67

말러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결국 그 두 개의 대립항 속에서 함께 부대끼는 일에 가깝다. 이를테면 그것은 천국과 지옥, 죽음과 삶, 진지함과 우스개, 종교적일 만큼 숭고해 보이는 아름다움과 유행가적 통속성, 고전적 형식미와 민초의 자유로움, 직관적이고 풍요로운 낭만과 차가운 이성 같은 것일 테다. 그래서 말러의 음악에는 따뜻한 위로보다는 오히려 통증의 감각이 선연하며, 너무 자주 듣다보면 현실의 삶에서 자칫 무기력해지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pp.162-163

포레는 마흔두 살에 작곡한 ‘레퀴엠’에서 죽음의 공포를 걷어내고 평화로운 안식을 노래한다. 다른 작곡가들의 ‘레퀴엠’에서 빈번히 형상화되던 지옥불의 공포가 사라진 대신 따뜻한 위로의 감정이 넘친다. 그는 ‘죽음의 자장가’로도 불렸던 자신의 레퀴엠에 대해 “죽음이란 고뇌에 차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마음으로 다음 세상을 맞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정신을 지배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가톨릭적 세계관이었으며 그것은 음악에 대한 관점으로도 이어졌다.--- pp.197-198

음악은 과연 정치와 무관한가? 이른바 ‘음악의 자율성’은 기회주의자들에게 훌륭한 자기변호의 수단이 된다. 카라얀도 그랬다. 그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망한 직후, 자신을 심문하던 미군 장교에게 “나는 단지 음악을 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한다. 그 ‘순수한 열정’은 약발을 톡톡히 받았다. 미군 장교는 “음악만을 자신의 생존으로 여기는, 오로지 음악만이 중요한 광신자”라는 보고를 상부에 올렸고, 카라얀은 2년 후에 모든 연주활동 금지에서 완전히 해제된다. 2년 동안의 연주 금지. 그것은 푸르트벵글러나 카를 뵘과 받았던 것과 같은 ‘형량’이었다.--- p.284

“피아니스트는 그저 홀에 있는 피아노로 연주해야 한다. 그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리히테르의 지론이었으며, 호들갑스러운 분위기를 유난히 못 견뎌했던 그가 미국 연주를 달가워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수십 대의 피아노를 보여주면서 콘서트에서 연주할 단 한 대를 골라보라고 권유하는 미국인들에게 그가 넌덜머리를 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러시아를 횡단하면서 소박한 ‘마을 연주회’를 펼쳤던 그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한다. “이런 연주회는 적어도 한 가지 장점이 있다오. 사람들이 속물근성 때문에 거기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기 위해서 오니까 말이오.”--- pp.316-317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이 책에서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것”을 ‘음예’라고 이름 짓는다. “안채에서 떨어져 신록의 냄새나 이끼 냄새가 나는 정원의 나무와 수풀 뒤에 마련돼 있는” 것. (……) 피레스의 연주는 바로 그 ‘음예’를 연상시킨다. 같은 라틴 계열인 아르헨티나 태생의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뜨거운 햇살처럼 타올랐다면, 세 살 아래의 피레스는 “서늘한 그늘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피아니스트였다. 건반을 질주하는 듯한 아르헤리치의 호방한 연주에 비하자면, 선천적으로 몸집과 손이 작은 피레스는 은은한 달빛에 가깝다.


 


-리뷰


 ▶ 감성과 지성이 어우러진 인문주의자의 클래식 읽기

음악은 애초에 인문학의 범주에 놓여 있었다. 미국의 인문학자 월터 카우프만에 따르자면 인문학이란 “철학과 문학, 종교와 역사, 음악과 미술”을 통틀어 일컫는다. 말하자면 음악이 지향하는 바는 이른바 ‘전인성’全人性이었다는 얘기다. - p.351

인문주의자가 들려주는 클래식 이야기에는 어떤 것들이 담길까? 16세기의 작곡가 바흐부터 현대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주앙 피레스까지 24명 남짓한 음악가들의 생애와 시대를 씨줄과 날줄로 엮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음악 담당기자이자 30여 년간 클래식 애호가로서 오랫동안 음악비평을 써온 문학수다. 그의 책 『아다지오 소스테누토』가 독자들에게 매혹적인 클래식 이야기를 펼쳐낸다. 저자는 음악을 감각의 기쁨과 위안을 주는 차원을 넘어 인간의 삶과 시대를 들여다보는 창으로서 이해한다. 예컨대 저자는 클로드 드뷔시의 음악에 대해 ‘현대적 회화성’으로 대변되는 독특한 음악적 감수성의 변화를 보여줬다고 지적하며, 드뷔시의 음악적 생애를 ‘모더니즘의 새벽’으로 규정한다. 구스타프 말러 편에서는 그가 보여준 정체성의 혼란, 삶에 대한 애착과 죽음의 공포 등을 그의 개인사적 궤적을 통해 살펴보면서, ‘분열된 주체’로서의 자아를 음악에 투영하면서 20세기의 징후를 포착한 음악가였다고 평한다. 또한 마리아 주앙 피레스 편에서는 일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 예찬’을 빌려와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달빛과 같은 “서늘한 그늘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음예의 피아니즘이라고 찬평한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기존의 클래식 교양서들에서 남발되는 뻔한 에피소드나 공허한 수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저자는 음악가들의 생애를 잡다하게 늘어놓기보다는 주제에 따라 주목할 만한 에피소드들을 기록하고, 그들의 음악 세계를 특유한 언어로 감각적으로 집어낸다. 이 책이 여느 클래식 교양서 이상으로 인문학적 깊이와 즐거움을 더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음악가들의 삶에 대해 전제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시야와 이를 음미할 수 있는 저자의 지적 깊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저자의 음악 공부는 그가 탐독했던 음악을 사랑했던 사상가들로부터 힘입은 바가 크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 니체와 아도르노, 비트겐슈타인과 에드워드 사이드, 슬라보예 지젝 등은 그에게 음악을 이해하는 또 다른 자극과 영감을 제공했다. 음악을 감각적으로 즐기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음악에 대한 애정을 폭넓은 독서로 연장시킨 저자의 노력이 책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 ‘생애’라는 앵글로 들여다본 특별한 음악 이야기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는 결국 사람을 만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그것이 음악 듣기의 궁극이라고 믿는다. 바흐를 들을 때는 바흐를 만나고, 베토벤이나 슈베르트를 들을 때는 또 그들과 조우하는 것이다.--- p.14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은 지루하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TV 드라마나 영화 배경음악에나 적당할 음악으로나 여길 뿐이다. 영상이나 가사 없는 ‘음악’을 한 시간 남짓 들어야 한다면 곤혹스러워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클래식은 그 안에 수많은 사연들과 드라마를 간직한 놀라운 이야기상자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생애’라는 앵글로 음악을 들여다보고 있다. 저자는 음악가의 삶을 따라가며 개인사에 중점을 두거나, 시대적 역할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고, 당대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예컨대 바흐에 대해 쓰고 있는 장에서는 뛰어난 생산력을 자랑했던 바흐의 작품이 오랜 시간 빛을 보지 못하다 수세기 뒤에 새롭게 발굴되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주며, 하이든을 서술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종속 음악가 신분에서 자유 시민이 된 하이든이 새로운 청중을 대상으로 음악을 쓰게 된 이야기가 당대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곁들여지며 서술된다. 또한 모차르트의 경우에는 익히 알려진 천재성의 이면에, 그의 성장과정에서 비롯한 신분상의 콤플렉스, 아울러 평생에 걸친 극심한 노동이 존재했음을 이야기한다.

유럽이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던 19세기 초·중반 활약했던 세 음악가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몽상적 내러티브를 음악으로 구현한 베를리오즈와 격렬한 열정을 건반 위에서 쏟아내고 짧은 생을 마친 쇼팽,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던 시대에 고즈넉하게 자기만의 세계를 침잠했던 《레퀴엠》의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가 대표적이다. 또한 작곡가들뿐 아니라 나치 시절의 지휘자들에 관한 서술도 주목할 만하다. 나치와 교묘히 협력하며 음악 권력의 자리를 장악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카를 뵘, 카라얀과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또 같은 시대에 그와는 반대의 길을 걸었던 지휘자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책의 후반부에는 저자가 오랫동안 애정을 품어온 연주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여러 장에 걸쳐 담겨 있다. 연주회 시작 2분 전에야 두터운 외투와 헐렁한 스웨터 차림으로 연주회장에 나타나 청중을 경악시킨 글렌 굴드, 관객들에게 최선의 피아노를 들려주기 위해서라며 보잉747 항공기로 자신이 늘 사용하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공수시키고 전속 요리사까지 대동해가며 연주회를 열었던 호로비츠 등 흥미로운 일화를 곁들여 명연주자들의 독특한 음악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밖에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에릭 사티, 쇤베르크, 야나체크, 쇼스타코비치 등을 생애와 음악의 연관성 속에서 조명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들의 삶 속에서 천재와 초인의 모습보다는, 욕망에 비틀거리고 콤플렉스 때문에 힘겨워하는 나약한 인간의 초상을 엿보게 될지 모른다.

▶ 30년 음악 애호가가 권하는 클래식과 친해지는 법

80년대 초반 대학생 시절에 클래식을 접한 저자에게 음악은 하나의 운명과 같았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d단조》에 붙은 ‘혁명’이라는 부제에 홀려 테이프가 닿도록 들었던 대학생은 30년이 넘어 어느덧 음악을 사랑하는 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었다. 클래식과 좀더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가 제안하는 방식은 이렇다. 처음에는 성악곡을 많이 들을 것. 오페라 아리아와 같이 인간의 목소리가 담긴 곡이야 말로 “가장 빠르고 리얼하게 가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란 것이다. 다음으로 “이 곡 저 곡 많이 들으려고 하지 말고, 같은 곡을 자꾸 반복해 들을 것”을 당부한다. 곡의 흐름을 외우는 순간, 다시 말해 그 곡의 전체적 구조가 머릿속에 들어올 때 음악은 ‘내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클래식 입문자들이 음악의 감흥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렇게 음악이 주는 감각적 느낌을 즐길 수 있을 때, 사람들은 음악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30년 공력의 음악 애호가의 체험에서 나온 이야기이기에 믿을 만하다. 이 책은 그렇게 음악에 대한 갈증을 품게 된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여전히 클래식이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급문화’라는 편견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러나 저자의 대학 시절처럼 부르주아적 취향이라는 눈초리 때문에 클래식 음반을 숨어서 들어야 할 시절은 옛날이다. 이미 우리나라의 주요 시市마다 교향악단이 생겨났고, 음악가들의 정기 공연과 순회 연주, 철마다 찾아오는 해외 유수의 지휘자와 관현악단의 내한 연주는 흔히 접할 수 있는 광경이다. 클래식이 대중에게 한발씩 다가가고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저자 또한 음악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숨기지 않는다. 제목인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느리게, 한음 한음을 깊이 눌러서)가 뜻하는 것처럼, 음악가 한 명 한 명의 생애를 음미하는 이 책이 특별한 매력을 주는 까닭은 음악 애호가들이 좀더 늘어나길 바라는 저자의 진정한 바람이 담겼기 때문이다.